<지붕킥>의 정음 씨에게 부치는 <1Q84> 추천 글

분류없음 2010/01/29 17:07 posted by 곱씹다
이 달 초 방송을 보니 무라카미 하루키를 몰라 곤혹을 치르더군요. 취업 준비 하랴 과외 하랴, 정신없죠? 에쿠니 가오리나 오쿠다 히데오가 더 익숙한 세대기도 할 테고요. 하긴 <상실의 시대>로 일찌감치국내에서 팬덤을 형성한 하루키지만, 21세기에 여전히 하루키를 읽는다는 건 얼마간 ‘길티 플레져’였는지도 몰라요. 일부 악의적 비판을 걷어 낸다손 쳐도, 주력하는 장편에서 그다지 성장하지 못했던 건 사실이거든요. 
 
반면 어느덧 생활인으로서 현실의 쳇바퀴에 오른 독자에게 하루키의 소설 속 심드렁한 주인공의 삶은, 출근 전쟁을 치르는 만원 버스에서 듣는 “눈이 참 예쁘게 오네요”라는 라디오 디제이의 멘트만큼이나 동떨어진 것이었고요. 물론 새로운 시도가 없었던 건 아니에요. <해변의 카프카>를 기점으로 좀 더 깊고 너른 세계로 나아가려고 했었죠. 여러모로 설익은 탓에 되레 한계만 드러냈지만요. 

그런데도 하루키의 <1Q84>를 권하는 건, 그것도 다 이 책을 내놓기 전까지의 소리기 때문이에요. <1Q84>에서 하루키는 문학 장르의 경계를 넘나들면서 일본의 사회 병리를 두루 건드리는가 하면, 치밀한 구성과 도저한 서사성으로 엄청난 흡인력을 발휘하거든요. 

의미심장한 건 그러면서도 자신의 스타일을 능란하게 밀어붙인다는 거고요. 요컨대 특유의 메타포와 더불어 댄디즘이에요. 교향곡과 재즈, 소설, 여행기가 예의 오마주처럼 등장하고 옷차림과 요리, 심지어 성애까지 노골적으로 묘사하는 걸 잊지 않는 거죠.

<1Q84>는 아오마메와 덴고의 아련한 첫사랑 이야기이자 두 사람이 ‘1Q84’라는 의문의 세계에 들어선 뒤 겪는 판타지예요. 위험한 임무를 맡게 되는 킬러 아오마메의 이야기와 한 소녀를 만나면서 그로테스크한 사건에 휘말리는 소설가 지망생 덴고의 이야기가 장을 번갈아 나오는 식이고요. 

결국 하루키는 현실과 판타지, 체제와 반체제가 기실 뒤틀려 연결되는 ‘뫼비우스의 띠’ 같다고 말하는 듯해요. 그럼 아오마메와 덴고는 그 이음매를 찾아 합일될 수 있을까요? 지훈 씨랑 함께 올 여름 출간될 3권의 답을 기다리는 것도 재밌을 거예요.

이덕원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1호차 7석에 앉은 면접기

e s s a y 2009/11/17 19:47 posted by 곱씹다
‘1호차 7석’이라······. 왠지 마음에 드는 좌석이었다. 행운의 숫자 7이 있어서는 아니었다. 적어도 내가 그렇게 유치한 사람은 아니다. 더구나 머리를 쥐어짜도 7이라는 숫자의 덕을 본 기억 같은 건 생각나지 않는다. 그렇다고 또 1과 7이 영화 <박사가 사랑한 수식>의 박사 식으로, 딱히 아름다운 숫자의 조합이어서도 아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중등교육 내내 평균을 뎅겅 깎아먹은 수학은 언제나 내 적용 범위를 넘어선 것이다. 

그저 1과 7의 늘씬한 맵시가 좋았을 뿐이다. 표현을 하자면 처음 보았지만 처음 본 것 같지 않은 풍경, 마치 이베리아 반도의 탱고를 추는 여인, 하지만 그 여인이 친숙하게 느껴지는 그런 느낌을 받았다, 나도. 가령 다양성을 존중한다는 미명 아래 저마다 몸매대로 숫자를 지정받는 파시즘 국가에서라면, 결코 내 몫으로 돌아올 리 없는 좌석이었다. 아마도 그곳에선 쌀보리 게임에 최적화된 내 배를 적발하고는 ‘5호차 55석’쯤에 내던질 터이다. 그것도 아주 쿨하게. 그러니 주어진 현실에 기꺼웠을밖에. 복고적인 시절은 하잘것없는 일도 은혜롭게 하는 마력을 지닌 법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열차는 예의 존재 이유에 충실해 나를 비롯한 승객들을 청량리역에 토해 놨고, 이에 질세라 나도 상경 목적에 충실하게 입사 면접을 봤다. 면접장에 간 건지 찜질방에 간 건지 나는 긴장한 탓에 족히 한 바가지의 육수를 손바닥으로 쏟아냈다. 아닌 게 아니라 몇 번의 면접이면 파시즘 국가에서 1호차 7석에 앉는 일 정도는 문제도 아닐 것 같았다. 한 시간짜리 모래시계도 열차와 나처럼 충실히 흘라갔고, 나는 오줌을 지리지 않았으니 썩 나쁘지 않은 면접이었다고 자위하며 다시 청량리역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차표 한 장 손에 들고 떠나려 하는데 이게 웬걸, 좌석을 확인하고자 본 차표엔 친숙한 탱고 여인이 있었다. 화들짝 놀라 오전의 것이 아닌지 눈을 크게 뜨고 다시 봤다. 하지만 차표에 똬리를 틀고 있는 건 분명히 하행선의 일란성 쌍둥이였다. TV 시리즈 <트윈 픽스>의 데일 쿠퍼가 좋아할 만한, 그야말로 기묘한 우연의 일치였다. 

춘천 가는 기차에 올라 한날 왕복으로 같은 좌석, 그것도 자신이 좋아하는 좌석의 차표를 우연히 받을 확률을 계산하려 했다. 그러나 영역 밖의 일은 역시 수학과 친구에게 의뢰하기로 하고 이내 관뒀다. 대신 나는 이쯤 되면 순순히 길조로 받아들이는 게 시대정신이라고 생각하며 쾌재를 불렀다. 

그로부터 며칠 뒤, 나는 두근두근하는 마음으로 면접을 치렀던 회사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말인즉 몸을 싣고 꿈도 싣고 내 마음 모두 실었건만, 정작 내 자리는 없다는 내용.  입석으로라도 어떻게 안 되겠느냐는 말이 목구멍까지 치밀어 오르는 걸 간신히 참아야 했다. 기어이 7이라는 녀석이 내 행운의 숫자로 등재되길 거부하고 만 것이다. 결국 다음엔 ‘1호차 11석’을 노려야겠다, 고 마음먹다 이내 중요한 건 마음이겠지, 하는 마음을 나는 또 먹었다. 우걱우걱. 

이덕원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