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능 전야(前夜)’면 예비 수험생의 모습은 크게 둘로 갈린다. 다음날 새벽부터 선배들을 응원하고자 일찌감치 잠자리에 드는 ‘새 나라의 어린이(?)’와, ‘예비’라는 보호막을 걷어내기에 앞서 기나긴 밤 동안 일탈을 감행하는 ‘불량 청소년’. 8년 전 춘천에서 고등학교에 다니던 나는 전형적인 후자에 속했다. 새 천 년에도 수능시험은 건재했고, 우리 차례마저 시나브로 다가오고 있었던 것이다. 더구나 타고 가던 ‘이해찬호’는 목적지까지 가지 않는다며 황급히 ‘주입식 교육호’로 갈아 태운 상황. 요컨대, 선배들의 수능만 끝나면 본격적으로 수험생이라는 딱지를 붙여 ‘입시 전쟁터’로 내몰 터였다. 결코 전날 밤을 허투루 보낼 순 없었다.
그러니 애초 응원 따윈 ‘정예부대’에 맡기기로 마음먹고 짬짬이 일탈을 계획했다. 멤버는 나를 포함해 같은 반 친구 7명. 일단 머리를 모으자 내용은 단박에 결정됐다. “예쁜 여자들과의 즐거운 술자리!” 아무렴, 술과 이성에 성급히 눈떠버린 열여덟 청춘에 그보다 좋은 일탈도 없었다.
그럼 ‘누구와 어디서’ 마시느냐가 관건이었다. 먼저 단속이 철저한 수능 전야엔 ‘뚫어놓은 술집’도 여간 부담스런 게 아니었다. 그래서 내가 낸 아이디어가 가까운 “강촌으로 진출하자”는 것. 유원지에서라면 팬션을 잡아 술을 마실 수 있지 않겠냐는 생각이었다. 물론 경비는 단골 메뉴인 ‘밥값·책값 빼돌리기 신공’으로 급조할 수 있었다. 남은 문제는 가장 중요한 여자들이었다. 궁여지책으로 저녁 시간마다 식당 대신 피시방으로 발길을 돌려 ‘채팅’에 열중했다. 계획을 털어놓는 족족 “즐팅”을 날리는 ‘님’들 사이에서 가까스로 네 명의 여학생과 ‘번개’을 잡았고, 모든 게 잘 풀리는 성싶었다.
일탈을 일탈하자 출동한 ‘경찰기동대(?)’
그리하여 학수고대했던 ‘디데이’. 사복으로 한껏 멋을 내고 약속장소인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설렘과 함께 ‘예쁜’ 여자가 아니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교차했다. 그때, 노심초사하는 우리 쪽으로 한 여자가 성큼성큼 걸어왔다. 시쳇말로 ‘전생에 지구를 구한 게 분명하다’ 싶은 미모였다. 뒤이어 다가온 그녀의 친구는 평범했지만, 넷 중 둘이 그 정도면 쾌재를 부를 일이었다. 그런데 웬걸, 그 둘이 전부였다. 나머지 두 명이 갑자기 못 나오게 됐다는 것이었다. 진작부터 짝을 맞추는 건 기대하지도 않았었지만, 그래도 남자 일곱에 달랑 여자 둘이라니 아무래도 김빠질밖에. 어쨌든 강촌행 막차는 제시간에 도착했고 고민할 겨를 없이 모두 버스에 올라야 했다.
일이 꼬인 것도 그때부터였다. 친구 녀석들의 마음이 하나같이 예쁜 여자에게로 쏠려 있었던 것이다. 물론 나 또한 별반 다르지 않았지만, 당장 닥친 난관에 애써 침착하고자 했다. 의도했던 즐거운 술자리를 위해선 보통 큰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즈음, 친구 K에게 걸려온 한 통의 전화. “야, 내 친군데 지금 강촌에 여자들 되게 많대.” 같은 계획을 세워 실행 중이라는 K 친구의 말은 가뜩이나 혼란스러운 상황에 나를 흔들었고, 불쑥 고약한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쟤네한텐 미안하지만, 그냥 강촌에서 ‘헌팅’하는 건 어때?” 다들 선뜻 결정을 못 하는 눈치였다. 하긴 인도적으로 너무한 일 같아 마음을 고쳐먹고 돌아섰다. 그사이 버스는 목적지에 다다랐고 지리를 아는 내가 앞장서서 내렸다. 그런데 우르르 쏟아지는 친구들 뒤로 무슨 영문인지 그녀들이 보이지 않았다.
“쟤넨 왜 안 내려? 내리라고 말 안 했어?”
“우리끼리 내리는 건 줄 알았지.”
“야, 그냥 해본 소리지!”
예나 지금이나 ‘소통의 부재’가 화근이다. 강촌을 지나 창촌까지 갔을 그녀들은 화가 단단히 났을 터. 설상가상으로, 어찌 된 일인지 강촌 거리엔 사람은커녕 개미 새끼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K 친구에 대한 응징을 뒤로하고, ‘일탈’된 계획을 제자리로 되돌리는 일이 시급했다. 결국 L이 그녀들에게 전화를 걸었고 자초지종을 설명하려던 그의 낯빛이 창백해졌다. 아차 싶어 내가 전화를 뺏어 받자, 아니나 다를까 ‘네이티브(?) 스피커’ 수준의 욕이 쏟아졌다. ‘이쯤 가면 막 하자는 거지’ 싶어 나 또한 욕을 돌려줬고, 잠시 뒤 전화가 끊겼다. 그러고 10분이나 지났을까. 표류하는 우리 쪽으로 웬 지프차 한 대가 다가오는 게 아닌가. 곧이어 선팅한 조수석 창문이 스르륵 열리더니 험악한 인상의 남자가 얼굴을 내밀고 외쳤다.
“저기 공터 보이지? 저기까지 빛의 속도로 뛴다. 실시!”
‘학생회장 인책론’에 선도부장을 제물로···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일단 냅다 달렸다. “경찰기동댄가 봐!” ‘도둑이 제 발 저린다’고 누군가의 말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리고 그때, 옆에서 달리던 Y 쪽에서 와당탕하는 소리가 들렸다. 깜짝 놀라 고개를 돌리자, Y가 그물에 걸린 물고기처럼 철조망에 걸려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시력이 나쁜 그가 정신없이 달리다 미처 자전거 대여점 울타리를 보지 못하고 ‘골인’한 것. 심각한 상황이었음에도 모두 폭소가 터지고 말았다.
“이 자식들이, 웃어?” 공터에서 기다리고 있던 남자의 불호령에 다시 현실을 직시했고, 이내 차 뒷문이 열리면서 상황이 제대로 파악됐다. “얘네 맞지? 너희 중에 아까 욕한 새끼 나와!” 뒷좌석에서 우리를 노려보고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그녀들. 그 남자는 경찰기동대가 아닌 그녀들의 ‘아는 오빠’이자 춘천에서 ‘침 좀 뱉는다’는 다른 학교 1년 선배였던 것이다. 그녀들의 호출을 받고 한달음에 출동한 듯 보였다. 욕하는 품이 여간 아니더니, ‘믿는 구석’이 있었던 셈이다. 망신도 이런 망신이 없었다. 하릴없이 내가 앞으로 나갔고, 순간 눈앞에 별이 보였다. 부러진 죽도로 머리를 얻어맞은 것.
“너희 인마, 사내자식들이 같이 놀기로 해놓고 여자애들을 버려? 너희 학교 학생회장 이름이 뭐야?”
“······.”
“말 안 해?”
“J요.”
"J? J, 이 자식을 조져야겠구먼."
그가 뜬금없는 ‘학생회장 인책론’을 제기하고 사라지자, 비로소 친구들이 펄쩍 뛰기 시작했다. J는 학생회장이 아니라는 얘기였다. 그러고 보니 J는 줄인 교복과 원색 신발로 패션을 선도하는 나를 괴롭히던 ‘선도부장’. 매일같이 보는 얼굴이 그 얼굴이니 헷갈렸던 것이다. 서둘러 친구들의 인맥을 총동원했고 간신히 J의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었다.
일이 이렇게 된 이상, 더는 강촌에 남아있을 이유가 없었다. 우리는 초연히 춘천행 막차에 몸을 싣고 학교 앞 고기 뷔페로 자리를 옮겼다. 우여곡절에 저녁을 걸러 헛헛한 속부터 달래야 했기 때문이다. 꾸역꾸역 고기를 입에 넣는 내내 “경찰기동대”라는 억측과 ‘그물에 낚인 Y’의 모습이 떠올라 한바탕 웃음이 쏟아졌다. 뷔페 문을 나오니 어느새 자정을 훌쩍 넘겨 수능일. 예비라는 보호막도 기어이 사그라져 있었다.
역시 8년 동안 웃기는 ‘개그맨 지망생’ 선배
그로부터 꼬박 1년 동안 우리는 잔인한 입시 전쟁을 치러야 했고, 마침내 수능일에 이르러선 희비가 엇갈렸다. 나 또한 세상이 세우는 줄대로라면 패자 축에 들 것만 같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시험이 끝나기가 무섭게 친구 H네 미용실로 달려갔다. 파마로 그간 억눌렸던 일탈을 한 방에 날려버리고자 했던 것이다. 그런데 한창 머리 손질을 하고 있을 때, 옆에서 티브이를 보던 Y가 화들짝 놀라며 나를 불렀다.
“야, 강촌에서 본 그 선배 티브이에 나왔어!”
“누구? 어! 그러네.”
“개그맨 지망생이라는데?”
“원래 저 선배가 좀 웃기잖아.”
심지어 그는 ‘8년째’ 웃기고 있다. 요즘도 7명의 친구는 수능 전야에 대한 얘기만 나오면 배꼽을 잡고 웃기 때문이다. 돌이켜 보면, 그날의 일탈은 고3 시절부터 지금까지 돈독한 우정을 쌓는 데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하룻밤의 망신이 8년 동안의 연대감으로 진화한 셈이다.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 ‘키팅 선생(로빈 윌리엄스 분)’이 읊던 <가지 않은 길>(로버트 프로스트 작)에 빗대면 "숲 속의 두 갈래 길에서 ‘우리는 실수로’ 왕래가 적은 길을 택했고, 그게 ‘우리 관계를’ 다르게 만들었다"고나 할까.
어느덧 스물여섯, 우리는 다시 취업이라는 전쟁과 맞닥뜨렸다. 역시 일탈이 간절한 시기지만, 그 사이 현실에 닳고 닳은 탓인지 누구도 ‘카르페 디엠(현재를 즐겨라)’을 외치지 못한다. 철은 없었어도 수능 전야의 추억이 더 애틋한 이유다.
이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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