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2010/01/29 <지붕킥>의 정음 씨에게 부치는 <1Q84> 추천 글
  2. 2009/11/17 1호차 7석에 앉은 면접기
  3. 2009/06/26 두발 자유를 위한 '바가지 머리' 소년들의 연대
  4. 2009/04/16 ‘잠룡’ 견자단, 이소룡의 스승이 돼 '승천'하다
  5. 2009/03/19 비루한 현실을 달콤하게 채색한 '발리우드'풍 동화

<지붕킥>의 정음 씨에게 부치는 <1Q84> 추천 글

r e v i e w 2010/01/29 17:07 posted by 곱씹다
이 달 초 방송을 보니 무라카미 하루키를 몰라 곤혹을 치르더군요. 취업 준비 하랴 과외 하랴, 정신없죠? 에쿠니 가오리나 오쿠다 히데오가 더 익숙한 세대기도 할 테고요. 하긴 <상실의 시대>로 일찌감치 국내에서 팬덤을 형성한 하루키지만, 21세기에 여전히 하루키를 읽는다는 건 얼마간 ‘길티 플레져’였는지도 몰라요. 일부 악의적 비판을 걷어 낸다손 쳐도, 주력하는 장편에서 그다지 성장하지 못했던 건 사실이거든요. 
 
반면 어느덧 생활인으로서 현실의 쳇바퀴에 오른 독자에게 하루키의 소설 속 심드렁한 주인공의 삶은, 출근 전쟁을 치르는 만원 버스에서 듣는 “눈이 참 예쁘게 오네요”라는 라디오 디제이의 멘트만큼이나 동떨어진 것이었고요. 물론 새로운 시도가 없었던 건 아니에요. <해변의 카프카>를 기점으로 좀 더 깊고 너른 세계로 나아가려고 했었죠. 여러모로 설익은 탓에 되레 한계만 드러냈지만요. 

그런데도 하루키의 <1Q84>를 권하는 건, 그것도 다 이 책을 내놓기 전까지의 소리기 때문이에요. <1Q84>에서 하루키는 문학 장르의 경계를 넘나들면서 일본의 사회 병리를 두루 건드리는가 하면, 치밀한 구성과 도저한 서사성으로 엄청난 흡인력을 발휘하거든요. 

의미심장한 건 그러면서도 자신의 스타일을 능란하게 밀어붙인다는 거고요. 요컨대 특유의 메타포와 더불어 댄디즘이에요. 교향곡과 재즈, 소설, 여행기가 예의 오마주처럼 등장하고 옷차림과 요리, 심지어 성애까지 노골적으로 묘사하는 걸 잊지 않는 거죠.

<1Q84>는 아오마메와 덴고의 아련한 첫사랑 이야기이자 두 사람이 ‘1Q84’라는 의문의 세계에 들어선 뒤 겪는 판타지예요. 위험한 임무를 맡게 되는 킬러 아오마메의 이야기와 한 소녀를 만나면서 그로테스크한 사건에 휘말리는 소설가 지망생 덴고의 이야기가 장을 번갈아 나오는 식이고요. 

결국 하루키는 현실과 판타지, 체제와 반체제가 기실 뒤틀려 연결되는 ‘뫼비우스의 띠’ 같다고 말하는 듯해요. 그럼 아오마메와 덴고는 그 이음매를 찾아 합일될 수 있을까요? 지훈 씨랑 함께 올 여름 출간될 3권의 답을 기다리는 것도 재밌을 거예요.

이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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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호차 7석에 앉은 면접기

e s s a y 2009/11/17 19:47 posted by 곱씹다
‘1호차 7석’이라···. 왠지 마음에 드는 좌석이었다. 행운의 숫자 7이 있어서는 아니었다. 적어도 내가 그렇게 유치한 사람은 아니다. 더구나 머리를 쥐어짜도 7이라는 숫자의 덕을 본 기억 같은 건 생각나지 않는다. 그렇다고 또 1과 7이 영화 <박사가 사랑한 수식>의 박사 식으로 딱히 아름다운 숫자의 조합이어서도 아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중등교육 내내 평균을 뎅겅 깎아먹은 수학은 언제나 내 적용 범위를 넘어선 것이다. 

그저 1과 7의 늘씬한 맵시가 좋았을 뿐이다. 표현을 하자면 처음 보았지만 처음 본 것 같지 않은 풍경, 마치 이베리아 반도의 탱고를 추는 여인, 하지만 그 여인이 친숙하게 느껴지는 그런 느낌을 받았다, 나도. 가령 다양성을 존중한다는 미명 아래 저마다 몸매대로 숫자를 지정받는 파시즘 국가에서라면, 결코 내 몫으로 돌아올 리 없는 좌석이었다. 아마도 그곳에선 쌀보리 게임에 최적화된 내 배를 적발하고는 ‘5호차 55석’쯤에 내던질 터이다. 그것도 아주 쿨하게. 그러니 주어진 현실에 기꺼웠을밖에. 복고적인 시절은 하잘것없는 일도 은혜롭게 하는 마력을 지닌 법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열차는 예의 존재 이유에 충실해 나를 비롯한 승객들을 청량리역에 토해 놨고, 이에 질세라 나도 상경 목적에 충실하게 입사 면접을 봤다. 면접장에 간 건지 찜질방에 간 건지 나는 긴장한 탓에 족히 한 바가지의 육수를 손바닥으로 쏟아냈다. 아닌 게 아니라 몇 번의 면접이면 파시즘 국가에서 1호차 7석에 앉는 일 정도는 문제도 아닐 것 같았다. 한 시간짜리 모래시계도 열차와 나처럼 충실히 흘라갔고, 나는 오줌을 지리지 않았으니 썩 나쁘지 않은 면접이었다고 자위하며 다시 청량리역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차표 한 장 손에 들고 떠나려 하는데 이게 웬걸, 좌석을 확인하고자 본 차표엔 친숙한 탱고 여인이 있었다. 화들짝 놀라 오전의 것이 아닌지 눈을 크게 뜨고 다시 봤다. 하지만 차표에 똬리를 틀고 있는 건 분명히 하행선의 일란성 쌍둥이였다. TV 시리즈 <트윈 픽스>의 데일 쿠퍼가 좋아할 만한, 그야말로 기묘한 우연의 일치였다. 

춘천 가는 기차에 올라 한날 왕복으로 같은 좌석, 그것도 자신이 좋아하는 좌석의 차표를 우연히 받을 확률을 계산하려 했다. 그러나 영역 밖의 일은 역시 수학과 친구에게 의뢰하기로 하고 이내 관뒀다. 대신 나는 이쯤 되면 순순히 길조로 받아들이는 게 시대정신이라고 생각하며 쾌재를 불렀다. 

그로부터 며칠 뒤, 나는 두근두근하는 마음으로 면접을 치렀던 회사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말인즉 몸을 싣고 꿈도 싣고 내 마음 모두 실었건만, 정작 내 자리는 없다는 내용.  입석으로라도 어떻게 안 되겠느냐는 말이 목구멍까지 치밀어 오르는 걸 간신히 참아야 했다. 기어이 7이라는 녀석이 내 행운의 숫자로 등재되길 거부하고 만 것이다. 결국 다음엔 ‘1호차 11석’을 노려야겠다, 고 마음먹다 이내 중요한 건 마음이겠지, 하는 마음을 나는 또 먹었다. 우걱우걱. 

이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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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발 자유를 위한 '바가지 머리' 소년들의 연대

r e v i e w 2009/06/26 16:16 posted by 곱씹다
어느 시골 마을, 모든 소년의 머리 모양이 하나같이 시커먼 바가지 엎어놓은 듯하다. 바야흐로 뱅 스타일의 대유행인가 싶겠지만, 웬걸 전통의 충실한 계승이다. 덕분에 귀엽긴 하지만 당최 개성이 없어 그놈이 그놈이다. 아니나 다를까, 이 이상한 마을의 사내아이들은 으레 유일한 이발관인 ‘요시노 이발관’에 머리를 내맡긴다. 머리 모양도 ‘생산지’의 이름을 따 ‘요시노 스타일’. 이 완전독점 이발관의 가위를 쥔 스타일리스트 요시노 아줌마(모타이 마사코)는 한술 더 뜬다. 학교 당국에 협력해 두발 검사를 할 정도로 전통 수호에 열성적인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감히 모두가 순종하는 이 율법을 거부하는 당찬 소년이 등장한다. 도쿄 물 좀 먹었다는 전학생이 잔뜩 힘줘 올린 염색 머리를 고수하려드는 것. 급기야 사태를 관망하던 요시노 아줌마의 아들과 그의 친구들까지 분연히 ‘두발 자유’를 부르짖고 조용했던 마을은 술렁이기 시작한다.


오기가미 나오코의 <요시노 이발관>은 일차적으로 요시노 스타일만큼이나 귀여운 성장영화다. 그리고 이 영화의 귀여움은 기본적으로 소년들의 머리 모양으로 뱅 스타일을 차용한 덕분이다. 뱅 스타일이 어디 웬만해서 소화할 수 있는 것이던가. 아닌 게 아니라, 극소수의 선택된 미소년이 아니고서야 조건반사로 추억의 ‘호섭이’부터 소환시키기 십상인 머리 모양. 범아들에겐 귀엽기는 쉬울지언정 멋있기는 어려운 노릇이다. 그러니 당사자인 아이들에겐 더욱 심각하고 제삼자인 관객에겐 마냥 귀여울 수밖에 없다. 가령 소년들의 머리가 모히칸 스타일이라든가 깍두기 스타일이었다면 아무래도 불가능했을 일이다.



런가 하면 시나브로 사춘기를 맞은 소년들의 모습은 성장영화 특유의 재미를 이끌어 낸다. 이성에게서 2차 성징의 흔적을 찾는 데 골몰하고 다시 그들에게 잘 보이고 싶어 아등바등하지만, 알다시피 저마다 얼굴형과 취향이 제각각임에도 아이들의 머리 모양은 정작 요시노 스타일로 통일돼야 한다. 실 어른들이 소년들에게 이 머리 모양을 강요하는 건, ‘뒷산의 괴물이 사내아이들을 잡아간다’는 전설을 막고자 생긴 전통 때문이다. 물론 21세기에 그런 전설은 이미 어른들에게도 믿거나 말거나. 그저 어른이건 아이건 대대로 그래 왔으니 지금도 지켜야 한다는 ‘수구’일 뿐이다. 그러나 당연하게 여기던 소년들이 전학생에게 감화되는 순간, 빈약한 논리의 벽은 비로소 개혁의 당위 앞에 뿌리째 흔들리고 만다. 그 후 아이들이 존중받지 못했던 개성을 좇아 벌이는 소동극은 사춘기의 에피소드와 맞물려 제법 코믹하게 그려진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 굳이 가상의 마을을 만들어 낸 뒤 여러 설정을 덧씌운 건 개성 있는 인권영화로서의 의미를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인다. 이를테면 두발 규제는 산신이라는 절대적 토속신앙에 기인하고, 이를 단속하는 건 마을의 교육기관인 학교 측과 이해관계인인 요시노 아줌마며, 심지어는 마을 방송을 통해 전통을 선전하는 사람도 이 아줌마다.


특히 마을로 울려 퍼지는 그의 방송은 자못 의미심장한데, 이 영화 밖의 어느 나라 정부가 추진하려는 정책과 싱크로율 100%기 때문이다. 이렇듯 이 영화는 여러모로 하 수상한 시절과 묘하게 맞닿아 공교로운 시기성을 만들어 낸다. 마이클 무어의 말마따나 “사람들은 논픽션을 좋아하지만 현실은 점점 픽션처럼 돼가고 있”는 셈이다.    


<요시노 이발관>은 <카모메 식당>으로 유명한 감독 오기가미 나오코의 장편 데뷔작이다. 지금까지 총 세 편의 영화밖에 만들지 않은 그가 최근 <안경>까지 두 편의  영화로 뚜렷한 마니아층을 형성하자 뒤늦은 개봉이 이뤄진 것이다.


앞서 개봉한 두 편의 영화가 독특한 캐릭터들을 통해 ‘슬로우 라이프’라는 메시지를 싱그럽게 설파하고 그들의 관계에서 인간미를 강조해 잔잔한 감동을 줬다면, 이 영화는 사춘기 시절을 추억하게 할 뿐만 아니라 인권과 표현의 자유가 얼마나 중요한지 다시금 상기시킨다. 물론 이 영화에서의 머리 모양과 집단 종교의식은 각각 <안경>에서의 안경과 집단 체조를 연상시킬뿐더러, 특정 공간에서 나름의 가치를 공유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은 그의 일관된 스타일이다. 녹록지 않은 어른의 삶을 상징하는 그 외의 요시노 가족이 이야기에 녹아들지 못하는 건 다소 아쉽지만, 성장영화로 보든 인권영화로 보든 ‘잘 자란 나무의 옛 떡잎’답다.

이덕원


- 덧붙이는 글 - 

<오마이뉴스>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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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룡’ 견자단, 이소룡의 스승이 돼 '승천'하다

r e v i e w 2009/04/16 16:13 posted by 곱씹다
오늘날 홍콩영화계 최고의 고수는 두말없이 견자단이다. 배우이기 이전에 무술인인 그는 중국 정통 무술을 기본으로 현대 격투기까지 넘나들며 실전을 방불케 하는 액션연기를 펼친다.(그는 원화평의 누이에게서 무술을 배운 어머니 덕택에 어려서부터 무술을 익힐 수 있었다고 한다) 아닌 게 아니라, 빠르고 강한 그의 액션은 홍콩 액션영화의 호시절을 그리워하는 팬들에게 유일한 위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액션연기 외적인 요소가 매번 견자단의 발목을 잡았는데, 영 작품 운이 없었던 것이다. 적어도 그가 주연을 맡은 영화들은 썩 변변치 않았다는 얘기다. 예컨대 최근 그의 필모그래피엔 <살파랑> <도화선> <용호문>같이 내러티브가 빈약해 탁월한 그의 액션만이 악전고투한 현대극이 있는가 하면, <칠검> <연의 왕후> <화피>같이 그조차 무색한 시대극도 있다. 여기엔 홍콩 액션영화가 전반적으로 침체된 데다 그가 더러 제작자나 감독, 무술감독으로 참여한 탓도 있을 터이다. 그렇다손 쳐도, 대개 걸출한 배우와 좋은 작품은 운명처럼 만나 선순환을 일으키게 마련. 하지만 그에겐 좀체 이런 공식이 적용되지 않는 듯했다.



그즈음 견자단에게 찾아온 영화가 바로 엽위신의 <엽문>이다. 실존했던 영춘권의 대가 엽문의 이야기가 영화화되면서 그가 주인공 엽문 역에 캐스팅된 것이다. 엽문은 홍콩 액션배우들의 우상인 이소룡의 스승으로도 유명한 인물.(현재 준비 중인 <엽문2>에선 이 대목도 다룰 예정이라고 한다) 더구나 그에게 <엽문>이 의미심장한 건 단독 주연 무협영화의 성공이야말로 홍콩영화계에서 당대 최고의 액션배우로서 받는 인증같은 존재기 때문이다. 일찍이 이소룡에게 <정무문>, 성룡에게 <취권> 시리즈, 이연걸에게 <황비홍> 시리즈라는 여의주가 있었듯 말이다.

  

1930년대, 중국 남권 무술의 발원지 불산엔 여러 문파의 무도관이 우후죽순으로 들어선다. 그중에서도 날쌔고 간결한 영춘권의 고수 엽문은, 뛰어난 무술 실력뿐만 아니라 훌륭한 인품도 지녀 만인의 존경을 받는 영웅. 그러던 어느 날 중일전쟁이 발발하고 불산도 일본의 수중에 떨어진다. 그 후 일본의 식민지 수탈 정책으로 인해 불산은 점차 황폐되고 그의 가족 또한 생활고에 시달리게 된다. 이에 그는 제자를 받지 않겠다는 소신을 굽히고 사람들이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도록 무술을 가르치기 시작한다. 또 민족혼을 말살하려는 일본군의 횡포에 많은 무인이 죽어 가자 민족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일본군과의 대결에 분연히 일어선다.

아니나 다를까 <엽문>은 온전히 견자단의 영화다. 그는 그나마 괜찮아진 내러티브 속에서 자신의 최대치를 유감없이 발휘한다. 먼저 그에게 으레 기대한 액션은 <도화선>에서 보여준 폭발적인 수준은 아닐지언정 과장되지 않고 절제돼 사실적으로 다가온다. 특히 중반부에 일본군을 상대하는 10대 1 액션 신이 단연 압권인데, 왜 그가 으뜸인지 다시 한 번 증명한다.(물론 그가 1이다) 그런데 액션보다 눈에 띄는 게 의외로 그 밖의 연기다. 그가 겸손한 무인이자 성 정치학적으로 올바른 가장인 엽문의 캐릭터를 완벽히 소화하는 까닭이다. 덕분에 여성이 만든 무술인 만큼 비교적 부드러운 영춘권과 맥락이 통하고 곤궁한 처지는 피부에 와 닿는다. 대체로 유순하나 때로는 카리스마 넘치는 그의 연기는, 강약의 조절이 능란할뿐더러 전작들과 교묘한 차이를 만든다. 어느덧 지천명을 바라보는 액션배우로서 그동안 누적된 마초 이미지를 덜어 내고 연기의 폭을 넓히는 쾌거다.(그는 1963년생으로 공교롭게도 이연걸과 동갑이다)


그런데도 <엽문>은 견자단을 가리고 보면 여러모로 아쉬운 영화다. 그도 그럴 것이 장르의 관습에 철저히 기대는 바람에 언뜻 다른 영화들이 겹쳐 보인다. 초반에 이른바 도장 깨기가 등장하고 후반에 최후의 일전으로 장식하는, 전형적인 플롯이기 때문이다. 일견 <황비홍1>으로 시작해 <무인 곽원갑>으로 끝나는 셈이다. 심지어 조연들의 캐릭터는 <황비홍1>을 닮아 리순(임가동)과 주청천(임달화)에게 각각 양관(원표)과 임진동(임세관)의 그림자가 어른거리기도 한다. 한술 더 떠서 망자의 매개물과 뒤늦은 후회(화해)라는 불필요한 클리셰에 이르면 손발이 오그라든다. 이 외에도 전반에 깔리는 애국주의가 외국인의 입장에선 다소 낯간지러울 수 있지만, 상처를 치유하는 방식으로 이해하면 담뿍 얹은 비장미와 유사한 과거 덕택에 제법 잔잔한 감동을 이끌어 낼 성싶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 견자단은 <황비홍2-남아당자강>에서 황비홍(이연걸)에게 고꾸라지는 사이비 교주 납란원술이었고, <신유성호접검>에서 맹성흔(양조위)에게 밀려 고소저(양자경)와 소소(왕조현)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 무인 엽상이었으며, <신용문객잔>에서 주방장의 칼에 두 다리마저 저며져 죽는 내시 조소흠이었다.(공교롭게도 양조위는 왕가위 감독의 <일대종사>에서 엽문 역을 맡았다) 물론 그에게도 2001년 미국에서 때늦게 개봉해 흥행과 평단의 인정을 모두 받은 <철마류>가 있긴 하다. 게다가 여기서 그는 황기영 역을 맡아 우영광(철마류 역)과 더불어 불타는 장대 위에서 액션영화사에 길이 남을 만한 명장면을 합작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런 영광은 우영광은 당연하고 감독 원화평과도 함께 나눠야 했고 아무래도 그에게 돌아오는 몫은 크지 않았다.(원화평은 일찌감치 그의 재능을 알아보고 영화계로 이끈 장본인이다) 그랬던 그가 <엽문>을 만나 비로소 크리티컬 매스(임계질량)에 도달한다. 잠룡’이 ‘승천하는 순간이다.

이덕원

- 덧붙이는 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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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루한 현실을 달콤하게 채색한 '발리우드'풍 동화

r e v i e w 2009/03/19 14:58 posted by 곱씹다
거액의 상금이 걸린 인도의 TV 퀴즈쇼 '누가 백만장자가 되고 싶은가'에서, 최종 라운드까지 오른 소년 자말 말릭(데브 파텔)이 부정행위를 의심받고 경찰에 넘겨진다. 이유는 교수, 변호사 같은 지식인들도 쩔쩔매는 수준의 문제들을 뭄바이 빈민가에서 태어나 정규교육도 받지 못한 전화상담원 보조가 맞혔다는 것. 그러나 경찰 조사에서 그는 자신이 살아온 녹록지 않았던 삶의 굽이굽이가 곧 문제를 푸는 열쇠였음을 밝힌다. 또 그가 퀴즈쇼에 출연한 '남다른' 목적이 스무고개처럼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한다.


올해 아카데미영화제에서 작품상을 비롯해 총 8개 부문을 휩쓴 화제작 <슬럼독 밀리어네어>(Slumdog Millionair)는 의외로 작품성에서는 그다지 빼어난 영화가 아니다. 지난 몇 년간 아카데미가 주목했던 어느 정도 진지한 영화들과 달리 그저 유쾌한 오락 영화에 가깝다는 말이다. 게다가 스케일 면에서도 소박한 축에 속하는 영화다. 그런데도 이 영화가 작품상을 거머쥘 수 있었던 건, 그만큼 여느 때보다 대중성과 이국적 정취에서 큰 점수를 딴 덕분으로 보인다.



더군다나 두 결정적 요인은 하나의 키워드로 만나기도 하는데, '발리우드'(인도의 영화 산업)가 바로 그것이다. 영국 출신의 대니 보일 감독은 인도를 배경으로 한 비카스 스와루프의 <Q&A>를 영화화하면서 공교롭게도 발리우드의 전형적인 스타일을 따랐다. 작가 사이먼 뷰포이가 원작 소설을 각색해 발리우드의 특색이라고 할 수 있는 애절한 멜로라인과 권선징악의 해피엔딩 등을 한결 부각한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일견 성장영화 같은 이 영화를 정작 관통하는 건 자말와 라타카(프리다 핀토)의 멜로다. 그리고 이들의 멜로라인을 도드라지게 하는 영화적 장치, 즉 사랑의 훼방꾼들도 하나같이 비참한 최후를 맞는 식이다.


그런가 하면 스타 배우 한 명 없이 인도 배우들을 위주로 이뤄진 캐스팅이나 발리우드 특유의 뮤지컬 같은 마지막 시퀀스, 인도의 전통 악기에 테크노를 접목한 음악 등은 이국적 정취에 한껏 매료되게 한다.(그나마 낯익은 얼굴이 영국 e4에서 2007년부터 방영됐던 드라마 <스킨스>(Skins) 시즌 1·2의 무슬림 앤워 카랄 역을 맡아 이름을 알린 데브 파텔이다) 자말의 삶에서 엿볼 수 있는 인도의 빈곤과 종교적 갈등, 인권 문제도 마찬가지로 서정적으로 그려지며 한껏 페이소스를 자아낸다. 그런데 이 영화의 한계도 여기서 기인한다. 결핍된 단면을 들여다보는 시선이 다소 관조적이기 때문이다. 영락없이 이방인의 거리가 느껴져 아쉬운 부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가 안전하게 잘 만든 오락 영화라는 점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기본적으로 스토리텔링 솜씨가 훌륭하기 때문이다. 이때 가장 돋보이는 게 탄탄한 플롯인데, 영화 후반까지 경찰의 추궁을 받는 자말의 현재 시점과 그의 해명에 따른 플래시백이 교차해 퀴즈쇼를 풀어가는 것처럼 흥미를 불러일으키고 긴장감을 고조한다. 특히 이야기가 하나의 시점으로 포개어지기 전후에 얼핏 '영심이'가 겹쳐 보이는 퀴즈쇼의 후반 라운드는 압권이다. 소신을 따르는 바람에 극적으로 행운을 잡는 데브 파텔의 모습이, 이 영화의 메시지를 감칠맛 나게 응축할뿐더러 휴먼 드라마로써의 감동을 남김없이 이끌어 내는 것이다. 만고불변의 진리지만 역설적으로 그렇기에 새롭지 않은 메시지가 퀴즈쇼라는 소재를 잘 활용하는 덕택에 색다르게 전해지는 셈이다.


그러고 보면 이 영화의 대중성은 거의 완전하다.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어른이라면 한번쯤 기대고 싶은 동화기 때문이다. 다만 이 영화가 들춘 인도의 환부만은 결코 "영화 속 이야기니까"라고 덮어버릴 수 없는, '엄연한 현실'이다. 물론 여기에 사실주의적 카메라를 들이대는 건 애당초 이 영화의 몫이 아니었으니 가타부타할 문제는 아닐 터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비루한 현실이 달콤한 동화를 채색하는 도구로만 쓰였을 때, 아무래도 뒷맛은 개운치 않다. 


이덕원


- 덧붙이는 글 - 

<오마이뉴스>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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