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2010/01/29 <지붕킥>의 정음 씨에게 부치는 <1Q84> 추천 글
  2. 2008/11/11 죽음도 삶의 일부로서 존재한다 (1)

<지붕킥>의 정음 씨에게 부치는 <1Q84> 추천 글

r e v i e w 2010/01/29 17:07 posted by 곱씹다
이 달 초 방송을 보니 무라카미 하루키를 몰라 곤혹을 치르더군요. 취업 준비 하랴 과외 하랴, 정신없죠? 에쿠니 가오리나 오쿠다 히데오가 더 익숙한 세대기도 할 테고요. 하긴 <상실의 시대>로 일찌감치 국내에서 팬덤을 형성한 하루키지만, 21세기에 여전히 하루키를 읽는다는 건 얼마간 ‘길티 플레져’였는지도 몰라요. 일부 악의적 비판을 걷어 낸다손 쳐도, 주력하는 장편에서 그다지 성장하지 못했던 건 사실이거든요. 
 
반면 어느덧 생활인으로서 현실의 쳇바퀴에 오른 독자에게 하루키의 소설 속 심드렁한 주인공의 삶은, 출근 전쟁을 치르는 만원 버스에서 듣는 “눈이 참 예쁘게 오네요”라는 라디오 디제이의 멘트만큼이나 동떨어진 것이었고요. 물론 새로운 시도가 없었던 건 아니에요. <해변의 카프카>를 기점으로 좀 더 깊고 너른 세계로 나아가려고 했었죠. 여러모로 설익은 탓에 되레 한계만 드러냈지만요. 

그런데도 하루키의 <1Q84>를 권하는 건, 그것도 다 이 책을 내놓기 전까지의 소리기 때문이에요. <1Q84>에서 하루키는 문학 장르의 경계를 넘나들면서 일본의 사회 병리를 두루 건드리는가 하면, 치밀한 구성과 도저한 서사성으로 엄청난 흡인력을 발휘하거든요. 

의미심장한 건 그러면서도 자신의 스타일을 능란하게 밀어붙인다는 거고요. 요컨대 특유의 메타포와 더불어 댄디즘이에요. 교향곡과 재즈, 소설, 여행기가 예의 오마주처럼 등장하고 옷차림과 요리, 심지어 성애까지 노골적으로 묘사하는 걸 잊지 않는 거죠.

<1Q84>는 아오마메와 덴고의 아련한 첫사랑 이야기이자 두 사람이 ‘1Q84’라는 의문의 세계에 들어선 뒤 겪는 판타지예요. 위험한 임무를 맡게 되는 킬러 아오마메의 이야기와 한 소녀를 만나면서 그로테스크한 사건에 휘말리는 소설가 지망생 덴고의 이야기가 장을 번갈아 나오는 식이고요. 

결국 하루키는 현실과 판타지, 체제와 반체제가 기실 뒤틀려 연결되는 ‘뫼비우스의 띠’ 같다고 말하는 듯해요. 그럼 아오마메와 덴고는 그 이음매를 찾아 합일될 수 있을까요? 지훈 씨랑 함께 올 여름 출간될 3권의 답을 기다리는 것도 재밌을 거예요.

이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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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도 삶의 일부로서 존재한다

r e v i e w 2008/11/11 23:54 posted by 곱씹다

다키타 요지로의 <굿’바이>는 ‘일본영화다운 일본영화’다. 혹 일본영화가 “나다운 게 뭔데?!”라는 클리셰로 묻는다면, 대답은 의외로 명쾌하다. ‘죽음’에 대한 반추와 ‘장인(匠人)’에 대한 경배, 그리고 ‘일상’에 대한 묘사. 적어도 드라마 장르에선 일본영화가 가장 잘 다루는 것들이다. 물론 이는 일본영화에 대해 호불호가 확연히 갈리는 이유이기도 하지만, 일본의 전통문화에서 기인한 특유의 매력임은 분명하다. 요컨대, 이 영화엔 이런 매력들이 온전히 들어있다. 장인을 소재로 설정하면서도 교묘하게 죽음을 주제로 내세우고 일상을 스토리텔링 방식으로 삼기 때문이다. 일본영화의 독보적인 장점들을 집대성한 영화인 셈. 아닌 게 아니라 이 영화는 2009년 미국 아카데미 외국영화상 부문의 일본 출품작이다.


도쿄에서 첼로를 연주하던 다이고(모토키 마사히로)는 오케스트라의 갑작스런 해체로 실업자 신세가 되자, 아내 미카(히로스에 료코)와 함께 고향 야마가타로 돌아간다. 어머니가 물려준 집에 정착해 새로운 일을 찾던 그의 눈에 들어온 건 ‘고수익 보장’, ‘초보 환영’이라는 구인광고. 그런데 이게 웬걸. 여행사인 줄로만 알고 간 그곳은 ‘영원한’ 여행의 안내자를 모집하는 납관회사다. 기겁하는 그에게 사장 이쿠에이(야마자키 쓰토무)가 고액의 월급을 제안하고 그는 하릴없이 일을 시작한다. 아니나 다를까 초기 호된 일에 갈등도 하는 그지만, 베테랑 납관사 이쿠에이가 망자를 대하는 모습에 감화되면서 시나브로 납관사라는 직업에 사명감을 느끼게 된다.



우리에겐 생소한 납관사는 일본에서 장의사가 장례를 치르기 전에 염습과 납관만을 전담하는 틈새 직업. <굿’바이>가 죽음과 장인, 그리고 일상을 동시에 다룰 수 있는 이유도 이 독특한 소재 덕분이다. 납관사의 일상을 세세히 관찰해 죽음에 관한 주제를 이끌어 내는 식이다. 그러니 이 영화에서 표면적으로 눈에 띄는 건 납관사라는 직업 그 자체인데, 이때 드러나는 게 바로 장인 정신이다. 실제로 이쿠에이와 변화한 다이고가 망자를 대하는 경건한 태도나 그들에 의해 한결 평온해져 떠나는 망자들의 모습에선 비장미를 넘어 숭고미마저 느껴진다.


나아가서 <굿’바이>는 ‘직업에 대한 귀천(貴賤)’이라는 영화적 장치를 배치해 극적 긴장감과 더불어 장인 정신을 한결 돋보이게 한다. 이를테면, 처음엔 상주와 친구의 멸시는 물론이거니와 이해심 많은 미카마저 납관사가 된 남편의 손이 “불결하다”며 뿌리치는 것이다. 사실 여기서 멸시의 밑바탕에 깔려있는 건 죽음에 대한 불편함이다. 죽음은 삶의 반대말, 즉 살아있는 자신에겐 까마득히 멀리 있는 불확실한 존재라고 여기고 막연한 두려움을 품는 것이다. 그러나 이 영화는 다이고가 납관사로서 마주하는 숱한 죽음을 통해 “죽음만큼 일반적인 게 어디 있냐”며 “언젠간 너도 죽고 나도 죽는다”고 주지시킨다. 실제로 납관사에 대한 사람들의 멸시도 죽음의 오롯한 실존을 맞닥뜨리는 순간에 이르러 되레 감사와 존경으로 전복되고 만다.


그런가 하면 <굿’바이>에서 나오는 다이고의 고향 혹은 소도시로의 회귀와 재래식 대중목욕탕의 존폐 위기는, 전자가 최근 일본영화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경향이라면 후자는 과거 장인을 다룬 일본영화에서 익히 봐온 관습이다. 모두 사라지는 것에 대한 ‘향수’ 에 잇닿는 대목으로 이 영화의 주제와도 정서적으로 더없이 어울린다. 그리고 이처럼 얽히고설킨 일본영화의 특징들은 소소한 일상의 결을 벗겨내는 화법에 의해 잘 맞물린다. 물론 이 영화가 시종일관 묵직하기만 한 건 아니다. 이 영화 초반 엉뚱한 상황에서 나오는 유머가 자칫 너무 처질 수 있는 분위기를 끌어올리기 때문이다. 외려 아쉬운 건 전형적인 3막 구조에서 아버지와의 매개물이나 균일하게 할당된 조연들의 사연이 다소 작위적으로 보인다는 점이다.


결국 <굿’바이>가 건네는 메시지는 공교롭게도 무라카미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에서 와타나베가 던진 말과 맥을 같이한다. “죽음은 삶의 반대편 극단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일부로서 존재한다.” 그럼 삶의 일부인 죽음 또한 응당 맞이할 우리는 어떡해야 할까? 이 영화는 트랜스젠더와 폭주족 등의 죽음에서 살아생전엔 미처 이루지 못한 가족 간의 화해를 보여줌으로써 삶의 무게를 강조한다. 납관사가 돼 처음으로 죽음을 실감한 다이고가 미카를 뜨겁게 안는 모습처럼, 우리네 삶도 뜨겁게 안으라는 조언이다.


이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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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Commented by BlogIcon 남다른 몽상가 at 2008/11/22 00:50

    다섯 번째 문단, 끝내지 못한 숙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