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2009/11/17 1호차 7석에 앉은 면접기
  2. 2008/08/01 일탈을 일탈해 벌어진 ‘경찰기동대(?)’ 소동
  3. 2008/07/28 "손님, 그 옷 잘 어울리세요! 믿어주세요"
  4. 2008/07/28 길티 플레져(guilty pleasure) (2)
  5. 2007/08/29 '공포의 삽겹살'에게 첫사랑이 왔을 때

1호차 7석에 앉은 면접기

e s s a y 2009/11/17 19:47 posted by 곱씹다
‘1호차 7석’이라······. 왠지 마음에 드는 좌석이었다. 행운의 숫자 7이 있어서는 아니었다. 적어도 내가 그렇게 유치한 사람은 아니다. 더구나 머리를 쥐어짜도 7이라는 숫자의 덕을 본 기억 같은 건 생각나지 않는다. 그렇다고 또 1과 7이 영화 <박사가 사랑한 수식>의 박사 식으로 딱히 아름다운 숫자의 조합이어서도 아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중등교육 내내 평균을 뎅겅 깎아먹은 수학은 언제나 내 적용 범위를 넘어선 것이다. 

그저 1과 7의 늘씬한 맵시가 좋았을 뿐이다. 표현을 하자면 처음 보았지만 처음 본 것 같지 않은 풍경, 마치 이베리아 반도의 탱고를 추는 여인, 하지만 그 여인이 친숙하게 느껴지는 그런 느낌을 받았다, 나도. 가령 다양성을 존중한다는 미명 아래 저마다 몸매대로 숫자를 지정받는 파시즘 국가에서라면, 결코 내 몫으로 돌아올 리 없는 좌석이었다. 아마도 그곳에선 쌀보리 게임에 최적화된 내 배를 적발하고는 ‘5호차 55석’쯤에 내던질 터이다. 그것도 아주 쿨하게. 그러니 주어진 현실에 기꺼웠을밖에. 복고적인 시절은 하잘것없는 일도 은혜롭게 하는 마력을 지닌 법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열차는 예의 존재 이유에 충실해 나를 비롯한 승객들을 청량리역에 토해 놨고, 이에 질세라 나도 상경 목적에 충실하게 입사 면접을 봤다. 면접장에 간 건지 찜질방에 간 건지 나는 긴장한 탓에 족히 한 바가지의 육수를 손바닥으로 쏟아냈다. 아닌 게 아니라 몇 번의 면접이면 파시즘 국가에서 1호차 7석에 앉는 일 정도는 문제도 아닐 것 같았다. 한 시간짜리 모래시계도 열차와 나처럼 충실히 흘라갔고, 나는 오줌을 지리지 않았으니 썩 나쁘지 않은 면접이었다고 자위하며 다시 청량리역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차표 한 장 손에 들고 떠나려 하는데 이게 웬걸, 좌석을 확인하고자 본 차표엔 친숙한 탱고 여인이 있었다. 화들짝 놀라 오전의 것이 아닌지 눈을 크게 뜨고 다시 봤다. 하지만 차표에 똬리를 틀고 있는 건 분명히 하행선의 일란성 쌍둥이였다. TV 시리즈 <트윈 픽스>의 데일 쿠퍼가 좋아할 만한, 그야말로 기묘한 우연의 일치였다. 

춘천 가는 기차에 올라 한날 왕복으로 같은 좌석, 그것도 자신이 좋아하는 좌석의 차표를 우연히 받을 확률을 계산하려 했다. 그러나 영역 밖의 일은 역시 수학과 친구에게 의뢰하기로 하고 이내 관뒀다. 대신 나는 이쯤 되면 순순히 길조로 받아들이는 게 시대정신이라고 생각하며 쾌재를 불렀다. 

그로부터 며칠 뒤, 나는 두근두근하는 마음으로 면접을 치렀던 회사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말인즉 몸을 싣고 꿈도 싣고 내 마음 모두 실었건만, 정작 내 자리는 없다는 내용.  입석으로라도 어떻게 안 되겠느냐는 말이 목구멍까지 치밀어 오르는 걸 간신히 참아야 했다. 기어이 7이라는 녀석이 내 행운의 숫자로 등재되길 거부하고 만 것이다. 결국 다음엔 ‘1호차 11석’을 노려야겠다, 고 마음먹다 이내 중요한 건 마음이겠지, 하는 마음을 나는 또 먹었다. 우걱우걱. 

이덕원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일탈을 일탈해 벌어진 ‘경찰기동대(?)’ 소동

e s s a y 2008/08/01 14:31 posted by 곱씹다

‘수능 전야(前夜)’면 예비 수험생의 모습은 크게 둘로 갈린다. 다음날 새벽부터 선배들을 응원하고자 일찌감치 잠자리에 드는 ‘새 나라의 어린이(?)’와, ‘예비’라는 보호막을 걷어내기에 앞서 기나긴 밤 동안 일탈을 감행하는 ‘불량 청소년’. 8년 전 춘천에서 고등학교에 다니던 나는 전형적인 후자에 속했다. 새 천 년에도 수능시험은 건재했고, 우리 차례마저 시나브로 다가오고 있었던 것이다. 더구나 타고 가던 ‘이해찬호’는 목적지까지 가지 않는다며 황급히 ‘주입식 교육호’로 갈아 태운 상황. 요컨대, 선배들의 수능만 끝나면 본격적으로 수험생이라는 딱지를 붙여 ‘입시 전쟁터’로 내몰 터였다. 결코 전날 밤을 허투루 보낼 순 없었다.


그러니 애초 응원 따윈 ‘정예부대’에 맡기기로 마음먹고 짬짬이 일탈을 계획했다. 멤버는 나를 포함해 같은 반 친구 7명. 일단 머리를 모으자 내용은 단박에 결정됐다. “예쁜 여자들과의 즐거운 술자리!” 아무렴, 술과 이성에 성급히 눈떠버린 열여덟 청춘에 그보다 좋은 일탈도 없었다.

그럼 ‘누구와 어디서’ 마시느냐가 관건이었다. 먼저 단속이 철저한 수능 전야엔 ‘뚫어놓은 술집’도 여간 부담스런 게 아니었다. 그래서 내가 낸 아이디어가 가까운 “강촌으로 진출하자”는 것. 유원지에서라면 팬션을 잡아 술을 마실 수 있지 않겠냐는 생각이었다. 물론 경비는 단골 메뉴인 ‘밥값·책값 빼돌리기 신공’으로 급조할 수 있었다. 남은 문제는 가장 중요한 여자들이었다. 궁여지책으로 저녁 시간마다 식당 대신 피시방으로 발길을 돌려 ‘채팅’에 열중했다. 계획을 털어놓는 족족 “즐팅”을 날리는 ‘님’들 사이에서 가까스로 네 명의 여학생과 ‘번개’을 잡았고, 모든 게 잘 풀리는 성싶었다.


일탈을 일탈하자 출동한 ‘경찰기동대(?)’


사용자 삽입 이미지

▲ 영화 <죽은 시인과 사회>


그리하여 학수고대했던 ‘디데이’. 사복으로 한껏 멋을 내고 약속장소인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설렘과 함께 ‘예쁜’ 여자가 아니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교차했다. 그때, 노심초사하는 우리 쪽으로 한 여자가 성큼성큼 걸어왔다. 시쳇말로 ‘전생에 지구를 구한 게 분명하다’ 싶은 미모였다. 뒤이어 다가온 그녀의 친구는 평범했지만, 넷 중 둘이 그 정도면 쾌재를 부를 일이었다. 그런데 웬걸, 그 둘이 전부였다. 나머지 두 명이 갑자기 못 나오게 됐다는 것이었다. 진작부터 짝을 맞추는 건 기대하지도 않았었지만, 그래도 남자 일곱에 달랑 여자 둘이라니 아무래도 김빠질밖에. 어쨌든 강촌행 막차는 제시간에 도착했고 고민할 겨를 없이 모두 버스에 올라야 했다.


일이 꼬인 것도 그때부터였다. 친구 녀석들의 마음이 하나같이 예쁜 여자에게로 쏠려 있었던 것이다. 물론 나 또한 별반 다르지 않았지만, 당장 닥친 난관에 애써 침착하고자 했다. 의도했던 즐거운 술자리를 위해선 보통 큰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즈음, 친구 K에게 걸려온 한 통의 전화. “야, 내 친군데 지금 강촌에 여자들 되게 많대.” 같은 계획을 세워 실행 중이라는 K 친구의 말은 가뜩이나 혼란스러운 상황에 나를 흔들었고, 불쑥 고약한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쟤네한텐 미안하지만, 그냥 강촌에서 ‘헌팅’하는 건 어때?” 다들 선뜻 결정을 못 하는 눈치였다. 하긴 인도적으로 너무한 일 같아 마음을 고쳐먹고 돌아섰다. 그사이 버스는 목적지에 다다랐고 지리를 아는 내가 앞장서서 내렸다. 그런데 우르르 쏟아지는 친구들 뒤로 무슨 영문인지 그녀들이 보이지 않았다.


“쟤넨 왜 안 내려? 내리라고 말 안 했어?”

“우리끼리 내리는 건 줄 알았지.”

“야, 그냥 해본 소리지!”


예나 지금이나 ‘소통의 부재’가 화근이다. 강촌을 지나 창촌까지 갔을 그녀들은 화가 단단히 났을 터. 설상가상으로, 어찌 된 일인지 강촌 거리엔 사람은커녕 개미 새끼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K 친구에 대한 응징을 뒤로하고, ‘일탈’된 계획을 제자리로 되돌리는 일이 시급했다. 결국 L이 그녀들에게 전화를 걸었고 자초지종을 설명하려던 그의 낯빛이 창백해졌다. 아차 싶어 내가 전화를 뺏어 받자, 아니나 다를까 ‘네이티브(?) 스피커’ 수준의 욕이 쏟아졌다. ‘이쯤 가면 막 하자는 거지’ 싶어 나 또한 욕을 돌려줬고, 잠시 뒤 전화가 끊겼다. 그러고 10분이나 지났을까. 표류하는 우리 쪽으로 웬 지프차 한 대가 다가오는 게 아닌가. 곧이어 선팅한 조수석 창문이 스르륵 열리더니 험악한 인상의 남자가 얼굴을 내밀고 외쳤다.


“저기 공터 보이지? 저기까지 빛의 속도로 뛴다. 실시!”


‘학생회장 인책론’에 선도부장을 제물로···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일단 냅다 달렸다. “경찰기동댄가 봐!” ‘도둑이 제 발 저린다’고 누군가의 말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리고 그때, 옆에서 달리던 Y 쪽에서 와당탕하는 소리가 들렸다. 깜짝 놀라 고개를 돌리자, Y가 그물에 걸린 물고기처럼 철조망에 걸려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시력이 나쁜 그가 정신없이 달리다 미처 자전거 대여점 울타리를 보지 못하고 ‘골인’한 것. 심각한 상황이었음에도 모두 폭소가 터지고 말았다.


“이 자식들이, 웃어?” 공터에서 기다리고 있던 남자의 불호령에 다시 현실을 직시했고, 이내 차 뒷문이 열리면서 상황이 제대로 파악됐다. “얘네 맞지? 너희 중에 아까 욕한 새끼 나와!” 뒷좌석에서 우리를 노려보고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그녀들. 그 남자는 경찰기동대가 아닌 그녀들의 ‘아는 오빠’이자 춘천에서 ‘침 좀 뱉는다’는 다른 학교 1년 선배였던 것이다. 그녀들의 호출을 받고 한달음에 출동한 듯 보였다. 욕하는 품이 여간 아니더니, ‘믿는 구석’이 있었던 셈이다. 망신도 이런 망신이 없었다. 하릴없이 내가 앞으로 나갔고, 순간 눈앞에 별이 보였다. 부러진 죽도로 머리를 얻어맞은 것.


“너희 인마, 사내자식들이 같이 놀기로 해놓고 여자애들을 버려? 너희 학교 학생회장 이름이 뭐야?”

“······.”

“말 안 해?”

“J요.”

"J? J, 이 자식을 조져야겠구먼."


그가 뜬금없는 ‘학생회장 인책론’을 제기하고 사라지자, 비로소 친구들이 펄쩍 뛰기 시작했다. J는 학생회장이 아니라는 얘기였다. 그러고 보니 J는 줄인 교복과 원색 신발로 패션을 선도하는 나를 괴롭히던 ‘선도부장’. 매일같이 보는 얼굴이 그 얼굴이니 헷갈렸던 것이다. 서둘러 친구들의 인맥을 총동원했고 간신히 J의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었다.


일이 이렇게 된 이상, 더는 강촌에 남아있을 이유가 없었다. 우리는 초연히 춘천행 막차에 몸을 싣고 학교 앞 고기 뷔페로 자리를 옮겼다. 우여곡절에 저녁을 걸러 헛헛한 속부터 달래야 했기 때문이다. 꾸역꾸역 고기를 입에 넣는 내내 “경찰기동대”라는 억측과 ‘그물에 낚인 Y’의 모습이 떠올라 한바탕 웃음이 쏟아졌다. 뷔페 문을 나오니 어느새 자정을 훌쩍 넘겨 수능일. 예비라는 보호막도 기어이 사그라져 있었다.


역시 8년 동안 웃기는 ‘개그맨 지망생’ 선배


그로부터 꼬박 1년 동안 우리는 잔인한 입시 전쟁을 치러야 했고, 마침내 수능일에 이르러선 희비가 엇갈렸다. 나 또한 세상이 세우는 줄대로라면 패자 축에 들 것만 같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시험이 끝나기가 무섭게 친구 H네 미용실로 달려갔다. 파마로 그간 억눌렸던 일탈을 한 방에 날려버리고자 했던 것이다. 그런데 한창 머리 손질을 하고 있을 때, 옆에서 티브이를 보던 Y가 화들짝 놀라며 나를 불렀다.


“야, 강촌에서 본 그 선배 티브이에 나왔어!”

“누구? 어! 그러네.”

“개그맨 지망생이라는데?”

“원래 저 선배가 좀 웃기잖아.”


심지어 그는 ‘8년째’ 웃기고 있다. 요즘도 7명의 친구는 수능 전야에 대한 얘기만 나오면 배꼽을 잡고 웃기 때문이다. 돌이켜 보면, 그날의 일탈은 고3 시절부터 지금까지 돈독한 우정을 쌓는 데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하룻밤의 망신이 8년 동안의 연대감으로 진화한 셈이다.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 ‘키팅 선생(로빈 윌리엄스 분)’이 읊던 <가지 않은 길>(로버트 프로스트 작)에 빗대면 "숲 속의 두 갈래 길에서 ‘우리는 실수로’ 왕래가 적은 길을 택했고, 그게 ‘우리 관계를’ 다르게 만들었다"고나 할까.


어느덧 스물여섯, 우리는 다시 취업이라는 전쟁과 맞닥뜨렸다. 역시 일탈이 간절한 시기지만, 그 사이 현실에 닳고 닳은 탓인지 누구도 ‘카르페 디엠(현재를 즐겨라)’을 외치지 못한다. 철은 없었어도 수능 전야의 추억이 더 애틋한 이유다.


이덕원

"손님, 그 옷 잘 어울리세요! 믿어주세요"

e s s a y 2008/07/28 19:21 posted by 곱씹다

내게도 '4억 청년 쇼핑몰'을 꿈꾸던 시절이 있었다. 한때 인터넷을 넘나드는 편집매장(Multi-Shop)을 차리려 했던 것. 2003년 가을, 나는 관련 경험을 쌓을 요량으로 덜컥 휴학을 감행했고, 마침 춘천 개점을 앞둔 어느 의류매장에 '판매직'으로 들어갔다.

날 위해(?) 수많은 일거리 주신 사장님
 
1·2층 매장만 약 330㎡(100여 평)에 직원은 나를 비롯해 고작 셋. 개점 준비부터 절대 녹록지 않았지만, 꼬박 일주일 고생해 개점하니 '개국공신'이라도 된 양 뿌듯하기만 했다.

그러나 자기도취도 잠시. 며칠 지나지 않아 우려했던 일이 터지고 말았다. 어마어마하게 들어온 화환이 발단이었다. 30여 개 넘는 화환을 옮기는 일이 고스란히 내 몫으로 돌아온 것이다. 더욱이 목적지는 건물 5층. 물론 사장님도 '살짝' 거들어 주셨지만, 공사장 막노동에도 말짱했던 내 강건한 신체도 다음날 몸살을 피하지 못했다.

사실 어느 정도 예견한 일이긴 했다. 브랜드 의류 매장마다 한 명씩 두는 남자직원은 대체로 ‘창고관리직’이라는 게 업계 정설이었기 때문이다.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곤 판매직으로 선호하는 성별은 단연 ‘여성’이라는 얘기다. 여자가 더 싹싹하고 섬세하다는 편견 때문일 터.

실제로 나는 한동안 판매는커녕 식사시간 외엔 창고 밖 세상을 보기 어려웠다. 외려 이따금 매장으ㅂ로 내려가면 여자직원들의 제품을 가져다주느라 3층 창고를 오르내리길 하루 수십 차례.  

이런 내 하소연에 사장님은 자신의 '깊은 뜻'을 밝혀 한낱 범부를 일깨워 주셨다.  

"너 나중에 옷가게 한다며. 재고정리하고 이러는 거 다 알아둬야 한다. '다 너를 위해서' 시키는 거야." 

아, 이쯤에서 오롯이 떠오르는 노랫말. '넬'의 'Thank you' 중 "정말, 다 나를 위해서였죠?" 되겠다.

"들어온 손님은 양말 하나라도 사서 나가게 하라" 

창고정리가 얼추 끝나자 제품박스가 들어오지 않는 날엔 짬짬이 판매할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드디어 남자라는 이유로 묻어두고 지낸 판매 실력을 십분 발휘하는 하려던 순간. 이게 웬걸. 뜻밖의 난관이 떡하니 기다리고 있었으니, 바로 '판매 실적에 대한 압박'이었다.

"덕원아, 왜 그냥 나가? 살 것 같더니."
"그냥 구경만 한댔어요."
"야, 일단 들어온 손님은 양말 하나라도 사서 나가게 해야 하는 거야."
 

그런 사장님의 판매 철학에 손님을 맞는 직원들의 마음이 편할 리 만무했고, 다들 '무조건 팔아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렸다. 문제는 그럴수록 정작 손님이 성가셔진다는 점. 가령, 눈요기만 한다는데도 점원이 졸졸 쫓아다니며 새빨간 거짓말을 늘어놓는 꼴이다.

심지어 두 명의 직원이 한 명의 손님을 에워싸 옴짝달싹 못하게 하는 웃지 못 할 광경도 연출되곤 했으니 말 다했다. 이 때문에 두 여자직원 사이에 "손님을 뺐어간다"며 갈등도 싹트기 시작했다.  

장사하시는 부모님 아들 21년에 '뜨내기장사'하고 말 것도 아니고 잘못됐다 싶었지만, 나 또한 별수 없었다. 자칫 '만년 창고관리직'으로 전락할지 모르는 처지가 아닌가.

강박 관념에 저지른 '비양심적인 판매' 

급기야 내 강박 관념은 궁극에 이르러 '비양심적인 판매'마저 저지르고 말았다. 어느 날, 매장 2층에서 고가의 보드 재킷에 관심을 보이는 내 또래의 남자 손님. 체격이 왜소해 한눈에 가장 작은 사이즈를 입어도 좀 클 성싶었다. 더더구나 그 제품은 스몰 사이즈뿐만 아니라 미디엄 사이즈도 동난 상황.  

하지만 그는 재킷에서 눈을 떼지 못했고, 나는 라지 사이즈라도 한번 입어보길 권했다. 말이 라지 사이즈지 미국 사이즈라 한 치수쯤 크게 나오는 걸 고려하면 105사이즈를 입힌 격. 세 사이즈는 족히 큰 재킷은 무릎 아래까지 내려와 있었고, 다른 매장이나 본사에 스몰사이즈의 재고를 알아보는 게 옳은 상황이었다.

그런데 그때, 내 주둥이에선 '헛소리'가 줄줄 새나왔다.

"잘 어울리시는데요! 손님, 체육관 롱 파카 아시죠? 이건 그렇게 길게 입는 거예요." 
"아, 그런가요? 그런데 이거 평상시에 입고 다녀도 괜찮겠죠?"
"그럼요, 디자인이 무난해서 상관없어요."
 

말을 뱉고 내가 '팔아야 한다'는 생각에 미쳤구나 싶었다. 순전히 거짓말이었기 때문이다. 보드 복 재킷을 힙합스타일로 입는 사람이야 많았지만, 무릎 아래까지 내려오는 일은 전무후무하다. 그것도 평상복으로….  

그럼에도 나는 기어이 그 재킷을 허리춤에 끼고 카운터로 내려왔고, 그는 계산을 하기 전 한 번 더 입어보겠다면서 거울 앞으로 다가갔다. 내 말만 철석같이 믿고 자신의 모습을 비춰 보는 그의 뒤로, 사장님을 비롯한 직원들의 폭소가 터졌다. 그제야 나는 내가 뭔가 단단히 잘못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손님은 왕이다'를 부르짖으며 정작 뒷구멍으론 사장님의 눈치만 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50여만원이라는 거금을 선선히 내고 사라졌지만, 나는 퇴근 후에도 그 모습이 어른거려 마음이 불편했다. 창고에서 썩을지언정, 이건 정말 아니었다. '중이 절 보기 싫으면 떠나야 한다'고 했던가? 그러나 도망치긴 싫었다. 대신 잘릴 때 잘리더라도 '소신껏' 일하자고 마음을 다잡았다. 얄팍한 상술 따윈 걷어치우고 내 가족, 친구처럼 손님을 대하겠다고….

잘릴 때 잘리더라도 소신껏 일하자 

실제로 그 후 사장님에 아랑곳하지 않고 소신대로 일했다. 하루는 편한 신발을 찾아 우편집배원 아저씨가 오셨다. 아니나 다를까 사장님은 슬그머니 내 뒤로 다가와 뜬금없이 고가의 고어텍스 등산화를 권하라고 속삭이셨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가볍고 비교적 저렴한 하이킹 슈즈를 권했고, 아저씨는 "편해서 좋다"며 사가셨다. 비 오는 날 신는 신발은 우체국에서 나온다는데, 평소 신을 신발로 굳이 무겁고 비싼 고어텍스를 살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사장님은 그런 내 행동이 못마땅하신 눈치.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 즈음부터 동화 같은 일이 벌어졌다. 내가 직원 중 연일 가장 많은 판매액을 올리기 시작한 것이다. 자연스레 사장님은 내 판매에 간섭하지 않으셨고, 되레 창고관리까지 도맡아 주셨다. 아마도 덜어낸 상술만큼 마음도 가벼워 자신감 넘치게 손님을 대한 게 통했으리라 짐작할 따름이다.

점입가경으로, 나만 찾는 단골손님도 하나 둘 늘어났다. 늘 함께 오는 단란한 가족, 수다스럽지만 인정 있는 아주머니들, 패션에 한창 눈뜬 고등학생 모두가 진정한 인센티브 같았다.

물론 매일같이 많은 사람을 상대해야 하는 일이다 보니 스트레스도 많이 받았다. 거나하게 취해 꼬투리를 잡더니 다짜고짜 욕을 퍼붓는 손님에겐 당해낼 도리가 없었다. 그저 마음속으로 '꿀밤 펀치'를 날리며 참을 뿐.  

사실 그보다 큰 애로사항은 '업계 표준'에도 못 미치는 근무여건이었다. 하루 13시간 근무, 월 2일 휴무에 월급은 달랑 70만원. 시급으로 환산하면 꼭 2000원이었다. 그렇다고 최저임금(당시 2510원)을 다 채워 받길 바란 것은 아니었다. 단지, 원하는 바는 업계 표준이었다.  

어느덧 매장도 자리를 잡아가면서 직원들은 이를 개선하고자 움직였다. 틈틈이 오다가다 만나는 앞집 '나이스' 직원, 옆집 '파마' 직원 등을 통해 업계 시장조사에 나선 것. 그 결과 '월급 80만원에 월 3일 휴무'라는 업계 표준을 사장님에게 제시했으나, 역시 호락호락할 리 없었다.

이에 궁여지책으로 직원들은 '하루 한 끼 먹기 운동'에 돌입하기에 이르렀다. 애초 우리 매장은 다른 데와 달리 매달 식대를 포함한 총 90만원에서 20만원 정도가 밥값으로 공제되는 식. 고로, 한 끼라도 덜 먹으면 한 푼 더 벌충할 수 있었다. '단식투쟁'의 성격도 있었음은 물론이다.  

어쨌든 덕분에 두 번째 달엔 80만원에 가까운 월급을 받을 수 있었다. 다만, 매일같이 저녁을 거르니 해가 떨어지면 다들 빌빌거릴밖에. 결국 그런 직원들을 보다 못한 사장님이 식대를 별도로 하는 조건으로, 월급을 75만원으로 올려 주시면서 우리의 보이콧은 끝을 맺었다. 더불어 휴무도 월 3회로 늘어났으니 소기의 성과를 쟁취한 셈이었다. 그러나 그 무렵 이미 직원들은 해묵은 갈등으로 하나둘 떠나기 시작했고, 나 또한 3개월을 채우고 그만뒀다.

그로부터 5년이 흘렀고, 나는 현재 수중에 4억원커녕 4만원도 없는 '취업준비생'이다. 그사이 더 값진 꿈을 만나 좇고 있는 까닭이다. 그럼에도 '본 게임'을 앞둔 지금, 지난날의 '예행연습'은 분야를 떠나 가까이 다가온다. 그리고 나지막이 말한다. '까짓 소신'이 돼버리는 요즈음이야말로 이를 시험할 절호의 기회라고.



이덕원

- 덧붙이는 글 -
 

<오마이뉴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 기사 보기]
 

길티 플레져(guilty pleasure)

e s s a y 2008/07/28 18:26 posted by 곱씹다

벌써 4년 전 일이다. 그해 겨울, 나는 신문사 인턴을 하느라 상경해 종로의 한 고시원에 머무르고 있었다. 인턴 초기 별로 맡겨지는 일이 없어 늘 칼퇴근이었지만, 퇴근을 해도 딱히 할 일은 없었다. 가뜩이나 대부분의 친구가 군복무 중이었던 시기에, 더군다나 서울은 철저한 타향이었던 까닭이다.


역시 마지못해 고시원 골방으로 직행하던 어느 날, 요기 거리를 찾아 들른 편의점에서 나의 ‘길티 플레져(대놓고 말하기에 부끄러운 악취미)’는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헛헛한 마음을 달래고자 선뜻 두 병의 소주를 손에 쥐고 만 것. 물론 그 순간 다른 손에 든 요기 거리는 이미 ‘안주 거리’가 돼버렸다.


그렇다. 나의 길티 플레져는 ‘집에서 홀로 마시는 술’이다. 정확히 말하면, 오로지 ‘소주’다. 이것이 길티인 이유이기도 하다. 맥주나 와인 따위로 가볍게 목을 적시는 정도였다면 애초 길티가 아니었을 테니.



그렇게 마시는 술은 여느 사람들의 눈에는 부정적으로만 보이나 보다. “웬 청승이냐”며 처량하게 보거나 ‘알코올중독’이 아닌지 걱정하는 눈이다. 이를테면 기껏 닭갈비와 소주를 사다 한상 차리고 배경음악까지 선곡해 첫잔을 비울라치면, 때마침 전화를 한 친구 녀석이 “왜 혼자 술을 마시느냐”며 한사코 ‘함께 마셔 주겠다’는 식이다.


그렇다고 시도 때도 없이 들입다 그런 일를 즐기는 것은 결코 아니다. 내가 집에서 홀로 술을 마시는 경우는 ‘깊은 고민에 빠져있을 때’에 한해서다. 더욱이 친구의 조언보다는 스스로 결단을 내려야 하는 중대한 순간이다. 한마디로 ‘내가 나를 모르는데, 넌들 나를 알겠느냐’쯤 되겠다.


실제로 골방에서 길티뿐만 아니라 ‘빈티’마저 내며 핫도그에 소주를 곁들였던 그해 겨울도 인턴기자로서의 부족한 능력을 절감한 시기였다. 그러나 그날의 술자리는 진정 ‘나는 누구인가’를 성찰하게 했고 비로소 막잔에 이르러서는 새로운 도전이라는 답을 내놨다.

김훈은 장편소설 <칼의 노래>에서 “술은 먼 것을 가깝게 당겨준다”고 했다. 나의 길티 플레져는 술의 이런 속성을 빌려 의식(意識)으로 낙관할 때 무의식을 당겨 비관해 보고, 반대로 의식으로 비관할 때 무의식을 당겨 낙관해 보는 시간인 셈이다.

인생은 나는 누구인가를 알아가는 과정이라고 한다. 결국 모든 문제는 나는 누구인가에서 비롯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나의 길티 플레져는 인생이라는 여정에서 잠시 멈춰서 지나온 길과 나아갈 길을 헤아리는 숭고한 ‘의식(儀式)’인 셈이다. 그래서 이런 의식은 나의 ‘플레져’다.  


이덕원


- 덧붙이는 글 -


2007년 6월11일 작성.

  1. Commented by 은재 at 2009/01/13 21:08

    혼자 마시는 술은 너무 빨리 취해요. >,.<

    • Commented by BlogIcon 곱씹다 at 2009/01/14 03:15

      정답!ㅋㅋ 그게 문제라면 문제지요~ '길티'인 이유 중 하나랍니다. 은재님은 참으시길...^^;

'공포의 삽겹살'에게 첫사랑이 왔을 때

e s s a y 2007/08/29 20:25 posted by 곱씹다
"아니, 지금 '괴물' 봐요?!"


1994년 여름, 어머니는 길 한복판에서 이렇게 소리쳤다. 내 나이 12살이던 그때, 지나가던 아주머니가 '기이하다'는 듯 나를 뚫어져라 쳐다봤기 때문이다. 남에게 싫은 소리 못하는 어머니가 그랬던 걸 보면, 아주머니의 표정이 영화 <괴물>에서 괴물의 등장을 볼 때처럼 경악을 금치 못했나 보다.


어머니의 속상한 마음은 당연하고 나를 '괴물 보듯' 한 아주머니의 표정까지 이해한다. 당시만 해도, 키 146cm에 몸무게가 74kg이나 나가는 '초특급 비만아'를 구경하기란 힘들었으니 말이다. 더불어 기상청 관측 기록상 가장 무더웠다는 그 여름, '산(山)'만 한 체격에 비 오듯 땀을 흘리며 가쁜 숨을 몰아쉬는 나 때문에 아주머니의 체감온도가 올라갔을 수도 있겠다.


'뚱뚱하다'는 놀림, 내성적으로 변한 나



그 정도로 나는 뚱뚱했다. 아니, '심하게' 뚱뚱했다. 10살 무렵부터 통통해지더니 어느덧 학교 '씨름부' 입단 제의를 끈질기게 받을 정도로 뚱뚱해진 것이다(마지못해 간 씨름부에서 운동장을 뛰라는 소리에 도망쳤다).


그래도 "물만 먹어도 살이 찐다"는 사람들처럼 억울하진 않았다. 많이 먹은 만큼 응당 많이 쪘기 때문이다. 먹을 것을 입에 달고 살고 콜라를 물처럼 마셨으니 '먹었다'보단 '넣었다'는 표현이 정확하겠다.


그런데 그렇게 살이 찌고 보니 뚱뚱한 아이들은 대부분 두 부류로 나뉘는 듯했다. 뚱뚱하다는 이유로 아이들의 놀림을 받는 아이와 뚱뚱할 뿐만 아니라 힘도 세 놀림을 면하는 아이. 이중 온순한 아이들에겐 어김없이 부한 포유류의 상징 '돼지'와 관련된 별명이 따라다녔다. 물론 거친 아이들도 뒤에서야 '돼지XX'라고 불렸을 테니 귀는 꽤 간지러웠으리라.


나는 이중 '집돼지'과에 속하면서도 이따금 '멧돼지'과로 변하는 독특한 유형이었던지라, 그나마 '적당한(?)' 놀림을 받으며 괴상한 별명이 붙었다. 수많은 별명 중 지금도 또렷이 떠오르는 것은 '공포의 삼겹살'.


내가 여느 사람들과는 다르다는 걸 깨달은 것도 친구들의 그런 장난 덕택이었다. 초등학교 6학년이 된 13살 때, 중력은 너무도 '공평'해 무거운 만큼 느렸고 허우적거리는 내 모습을 즐기는 상대방 공격수에게 유린을 당하기 일쑤였다.


또 수업시간에 소재만 생기면 '뚱뚱'과 엮은 친구들의 장난이 끊이지 않았다. 이를테면, 선생님이 어쩌고저쩌고 말하면 "어? 거기 덕원이가 누우면 못 지나가겠다"라는 식이었다. 도대체 어떤 길이 그리도 협소하단 말인가! 그럴 때면 '공포의 삼겹살'로 변신해 응징하기도 했지만, 미봉책에 불과했다.


첫사랑과 함께 온 '첫 다이어트'



그럼에도 나는 심각하게 받아들잊 않았고, 중학생이 되고도 조금씩 들쭉날쭉할 뿐 모양새엔 변화가 없었다. 친구들의 장난이 여전했던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다만, 중학교 입학 후 달라진 점이 있다면 '특별대우'를 받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1학년 어느 날, 양호선생님이 찾아와 몇몇 아이들의 이름을 불렀고, 일어나는 아이들은 하나같이 뚱뚱했다. 이내 내가 호명됐고 뒤따른 말에 얼굴이 화끈거렸다. "중등도 비만."


아이들 사이에서 '비만클럽'이라고 부른 이 특별대우는 일 년에 한 번 비만인 아이들만 누릴 수 있는 방과 후 건강검진이었다. 나는 다음해에도 연이어 '중등도 비만'이라는 타이틀을 거머쥐었고, 내성이 생겨 그러려니 비만클럽을 찾아 이전에도 만났던 친구들과 "왔어? 올 줄 알았지"라고 반기며 진한 '동족애'를 느꼈다.


그렇게 특별대우에도 익숙해진 같은 해 가을, 내 '비만 인생'에 역사적인 사건이 터졌다. 열다섯 사춘기 소년에게 '첫사랑'이 찾아온 것. 처음 보는 순간 사방이 뿌예지더니 이후 지나칠 때면 가슴이 방망이질을 쳤다. 매일같이 마주쳤지만 내겐 말은커녕 쪽지 한 장 건넬 '용기'가 없었다.


활달했던 아이는 살이 찌면서 언젠가부터 '내성적'인 소년이 돼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내 체격은 키 169cm에 몸무게 85kg. 거침없이 늘어난 살과는 반대로 '자신감'은 줄어있었던 것이다. 드라마 <파리의 연인>에서 김정은의 대사 "이 꼴을 하고서 어떻게 그래요"가 꼭 내 마음이었다.


짝사랑에 사춘기 소년의 가슴앓이는 계속됐고, 결국 굳은 마음을 먹었다. 그녀 앞에 당당히 설 수 있게 "변하자"고. 온갖 '돼지'류의 별명에도 꼼짝을 않았던 내가 난생처음 다이어트를 시작한 것이다.


그해의 겨울방학, 다이어트엔 달리 축지법(縮地法)이 없었고 하루 밥 한 끼 그것도 달랑 한 공기만 먹기 시작했다. 그래도 허기진 배는 오이나 물 따위로 채웠고 가벼운 운동도 곁들였다. 사춘기 짝사랑의 간절함에 난 독했고 그 결과 한 달 만에 '10여kg 감량'에 성공했다.


그렇다면, 이제 남은 건 고백뿐! '사랑은 타이밍'이라고 했던가? 기껏 살을 뺐거늘, 그녀는 갑자기 학원에 나오지 않았고 그렇게 말 한마디 못한 채 떠나보냈다(?). 


살 빼니 사람들도 나도 '달라지더라'


사용자 삽입 이미지

▲ 다이어트 성공 후인 고등학교 1학년 겨울. ⓒ 이덕원


그래도 이루지 못한 첫사랑은 내게 값진 '선물'을 안겨다 줬다. 3학년, '비만클럽'에서 내가 '과체중'으로 특별대우 대상에서 제외된 것이다. 교실에서는 친구들의 축하 인사가 이어졌고, 복도에서 마주치는 옛 동족들은 놀라움과 함께 부러움을 금치 못했다.


한칸 한칸 허리띠 안쪽으로 구멍을 뚫어가는 재미에 이후에도 다이어트는 끝나지 않았다. 고등학교 입학시험을 준비하면서 식사량을 조절하는 것만으로 다시 일 년여 동안 몸무게를 5kg 정도 줄였고, 반대로 키는 꾸준히 컸다.


'키 184cm에 몸무게 72kg'. 고교 입학 후 내 첫 신체검사 기록이다. 나는 변했다. 아니, 나보다 나를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가 먼저 변했다. 더는 뚱뚱하지 않으니 돼지와 관련된 별명도 붙지 않았다. 오히려 나는 '늘씬한 몸매'에 부러움의 대상이 됐다. 처음엔 익숙하지 않았다. 사람들의 태도도 거울 속에 비친 내 모습도.


그런 나보다 낯설어하는 이들이 있었으니, 바로 초등학교 동창들이었다. 거리에서 마주친 친구들에게 다가가 인사를 걸어도 '누군가?' 하고 고개를 갸우뚱거리거나 놀라서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는 일이 부지기수였다. 12살 적에 나를 보고 놀란 아주머니의 표정이 '웩'이었다면 그때 친구들의 표정은 '와'였던 것이다.


나도 변하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퇴화됐던 '자기애'가 솟아났다. 그렇게 '정상인'으로서의 시간이 지날수록 활달하고 적극적인 사람으로 돌아갔다. 다이어트로 잃었던 자신감을 되찾은 셈이다.


그러고 보면, 비만은 '정신적' 질병이기도 하다. 대개 사람들의 놀림과 거울에 비친 볼품없는 모습에 자기애는커녕 자괴하기 십상이라 작게는 자신감의 상실, 크게는 우울증을 부르기 때문이다(개중에는 이를 아랑곳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


재발할 뻔한 비만, '다시 시작'한 다이어트


사용자 삽입 이미지

▲ 최근 모습에 가장 가까운 사진. ⓒ 이덕원

방심은 금물. 대학 입학 후에도 어느 정도 유지됐던 내 늘씬한 몸매는 지난해부터 형태를 잃고 말았다. 결국, 올 초 같은 키에 94kg까지 체중이 불어 비만의 문턱까지 다다랐다.

더욱이 스물다섯 청년이 '배'에만 집중적으로 살이 쪄 이른바 'D라인'을 이루는 게 문제였다. 하릴없이 '재발'을 막고자 잊고 지낸 다이어트를 다시 시작했고 현재 88kg이라는 고지에 이르렀다.


자신감이 넘치는 사람은 언제나 매력적이다. 'S라인', 'M라인'을 만들지 않더라도 자신감이라는 '정신적 건강'은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내가 다시 다이어트를 결심하는 이유다.
 


이덕원 


- 덧붙이는 글 - 


<오마이뉴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 기사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