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2008/08/01 일탈을 일탈해 벌어진 ‘경찰기동대(?)’ 소동
  2. 2007/09/13 애틋한 그 시절만큼 그리운 드라마 <사춘기> (2)
  3. 2007/08/05 시간도 고통을 줄여줄 뿐 상처를 아물게 하진 못한다
  4. 2007/07/19 지갑 ‘잃어버려’, ‘잊어버릴’ 뻔한 추억
  5. 2007/07/17 사연이 있는 음식, '돈가스'와 '된장죽'

일탈을 일탈해 벌어진 ‘경찰기동대(?)’ 소동

e s s a y 2008/08/01 14:31 posted by 곱씹다

‘수능 전야(前夜)’면 예비 수험생의 모습은 크게 둘로 갈린다. 다음날 새벽부터 선배들을 응원하고자 일찌감치 잠자리에 드는 ‘새 나라의 어린이(?)’와, ‘예비’라는 보호막을 걷어내기에 앞서 기나긴 밤 동안 일탈을 감행하는 ‘불량 청소년’. 8년 전 춘천에서 고등학교에 다니던 나는 전형적인 후자에 속했다. 새 천 년에도 수능시험은 건재했고, 우리 차례마저 시나브로 다가오고 있었던 것이다. 더구나 타고 가던 ‘이해찬호’는 목적지까지 가지 않는다며 황급히 ‘주입식 교육호’로 갈아 태운 상황. 요컨대, 선배들의 수능만 끝나면 본격적으로 수험생이라는 딱지를 붙여 ‘입시 전쟁터’로 내몰 터였다. 결코 전날 밤을 허투루 보낼 순 없었다.


그러니 애초 응원 따윈 ‘정예부대’에 맡기기로 마음먹고 짬짬이 일탈을 계획했다. 멤버는 나를 포함해 같은 반 친구 7명. 일단 머리를 모으자 내용은 단박에 결정됐다. “예쁜 여자들과의 즐거운 술자리!” 아무렴, 술과 이성에 성급히 눈떠버린 열여덟 청춘에 그보다 좋은 일탈도 없었다.

그럼 ‘누구와 어디서’ 마시느냐가 관건이었다. 먼저 단속이 철저한 수능 전야엔 ‘뚫어놓은 술집’도 여간 부담스런 게 아니었다. 그래서 내가 낸 아이디어가 가까운 “강촌으로 진출하자”는 것. 유원지에서라면 팬션을 잡아 술을 마실 수 있지 않겠냐는 생각이었다. 물론 경비는 단골 메뉴인 ‘밥값·책값 빼돌리기 신공’으로 급조할 수 있었다. 남은 문제는 가장 중요한 여자들이었다. 궁여지책으로 저녁 시간마다 식당 대신 피시방으로 발길을 돌려 ‘채팅’에 열중했다. 계획을 털어놓는 족족 “즐팅”을 날리는 ‘님’들 사이에서 가까스로 네 명의 여학생과 ‘번개’을 잡았고, 모든 게 잘 풀리는 성싶었다.


일탈을 일탈하자 출동한 ‘경찰기동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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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죽은 시인과 사회>


그리하여 학수고대했던 ‘디데이’. 사복으로 한껏 멋을 내고 약속장소인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설렘과 함께 ‘예쁜’ 여자가 아니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교차했다. 그때, 노심초사하는 우리 쪽으로 한 여자가 성큼성큼 걸어왔다. 시쳇말로 ‘전생에 지구를 구한 게 분명하다’ 싶은 미모였다. 뒤이어 다가온 그녀의 친구는 평범했지만, 넷 중 둘이 그 정도면 쾌재를 부를 일이었다. 그런데 웬걸, 그 둘이 전부였다. 나머지 두 명이 갑자기 못 나오게 됐다는 것이었다. 진작부터 짝을 맞추는 건 기대하지도 않았었지만, 그래도 남자 일곱에 달랑 여자 둘이라니 아무래도 김빠질밖에. 어쨌든 강촌행 막차는 제시간에 도착했고 고민할 겨를 없이 모두 버스에 올라야 했다.


일이 꼬인 것도 그때부터였다. 친구 녀석들의 마음이 하나같이 예쁜 여자에게로 쏠려 있었던 것이다. 물론 나 또한 별반 다르지 않았지만, 당장 닥친 난관에 애써 침착하고자 했다. 의도했던 즐거운 술자리를 위해선 보통 큰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즈음, 친구 K에게 걸려온 한 통의 전화. “야, 내 친군데 지금 강촌에 여자들 되게 많대.” 같은 계획을 세워 실행 중이라는 K 친구의 말은 가뜩이나 혼란스러운 상황에 나를 흔들었고, 불쑥 고약한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쟤네한텐 미안하지만, 그냥 강촌에서 ‘헌팅’하는 건 어때?” 다들 선뜻 결정을 못 하는 눈치였다. 하긴 인도적으로 너무한 일 같아 마음을 고쳐먹고 돌아섰다. 그사이 버스는 목적지에 다다랐고 지리를 아는 내가 앞장서서 내렸다. 그런데 우르르 쏟아지는 친구들 뒤로 무슨 영문인지 그녀들이 보이지 않았다.


“쟤넨 왜 안 내려? 내리라고 말 안 했어?”

“우리끼리 내리는 건 줄 알았지.”

“야, 그냥 해본 소리지!”


예나 지금이나 ‘소통의 부재’가 화근이다. 강촌을 지나 창촌까지 갔을 그녀들은 화가 단단히 났을 터. 설상가상으로, 어찌 된 일인지 강촌 거리엔 사람은커녕 개미 새끼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K 친구에 대한 응징을 뒤로하고, ‘일탈’된 계획을 제자리로 되돌리는 일이 시급했다. 결국 L이 그녀들에게 전화를 걸었고 자초지종을 설명하려던 그의 낯빛이 창백해졌다. 아차 싶어 내가 전화를 뺏어 받자, 아니나 다를까 ‘네이티브(?) 스피커’ 수준의 욕이 쏟아졌다. ‘이쯤 가면 막 하자는 거지’ 싶어 나 또한 욕을 돌려줬고, 잠시 뒤 전화가 끊겼다. 그러고 10분이나 지났을까. 표류하는 우리 쪽으로 웬 지프차 한 대가 다가오는 게 아닌가. 곧이어 선팅한 조수석 창문이 스르륵 열리더니 험악한 인상의 남자가 얼굴을 내밀고 외쳤다.


“저기 공터 보이지? 저기까지 빛의 속도로 뛴다. 실시!”


‘학생회장 인책론’에 선도부장을 제물로···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일단 냅다 달렸다. “경찰기동댄가 봐!” ‘도둑이 제 발 저린다’고 누군가의 말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리고 그때, 옆에서 달리던 Y 쪽에서 와당탕하는 소리가 들렸다. 깜짝 놀라 고개를 돌리자, Y가 그물에 걸린 물고기처럼 철조망에 걸려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시력이 나쁜 그가 정신없이 달리다 미처 자전거 대여점 울타리를 보지 못하고 ‘골인’한 것. 심각한 상황이었음에도 모두 폭소가 터지고 말았다.


“이 자식들이, 웃어?” 공터에서 기다리고 있던 남자의 불호령에 다시 현실을 직시했고, 이내 차 뒷문이 열리면서 상황이 제대로 파악됐다. “얘네 맞지? 너희 중에 아까 욕한 새끼 나와!” 뒷좌석에서 우리를 노려보고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그녀들. 그 남자는 경찰기동대가 아닌 그녀들의 ‘아는 오빠’이자 춘천에서 ‘침 좀 뱉는다’는 다른 학교 1년 선배였던 것이다. 그녀들의 호출을 받고 한달음에 출동한 듯 보였다. 욕하는 품이 여간 아니더니, ‘믿는 구석’이 있었던 셈이다. 망신도 이런 망신이 없었다. 하릴없이 내가 앞으로 나갔고, 순간 눈앞에 별이 보였다. 부러진 죽도로 머리를 얻어맞은 것.


“너희 인마, 사내자식들이 같이 놀기로 해놓고 여자애들을 버려? 너희 학교 학생회장 이름이 뭐야?”

“······.”

“말 안 해?”

“J요.”

"J? J, 이 자식을 조져야겠구먼."


그가 뜬금없는 ‘학생회장 인책론’을 제기하고 사라지자, 비로소 친구들이 펄쩍 뛰기 시작했다. J는 학생회장이 아니라는 얘기였다. 그러고 보니 J는 줄인 교복과 원색 신발로 패션을 선도하는 나를 괴롭히던 ‘선도부장’. 매일같이 보는 얼굴이 그 얼굴이니 헷갈렸던 것이다. 서둘러 친구들의 인맥을 총동원했고 간신히 J의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었다.


일이 이렇게 된 이상, 더는 강촌에 남아있을 이유가 없었다. 우리는 초연히 춘천행 막차에 몸을 싣고 학교 앞 고기 뷔페로 자리를 옮겼다. 우여곡절에 저녁을 걸러 헛헛한 속부터 달래야 했기 때문이다. 꾸역꾸역 고기를 입에 넣는 내내 “경찰기동대”라는 억측과 ‘그물에 낚인 Y’의 모습이 떠올라 한바탕 웃음이 쏟아졌다. 뷔페 문을 나오니 어느새 자정을 훌쩍 넘겨 수능일. 예비라는 보호막도 기어이 사그라져 있었다.


역시 8년 동안 웃기는 ‘개그맨 지망생’ 선배


그로부터 꼬박 1년 동안 우리는 잔인한 입시 전쟁을 치러야 했고, 마침내 수능일에 이르러선 희비가 엇갈렸다. 나 또한 세상이 세우는 줄대로라면 패자 축에 들 것만 같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시험이 끝나기가 무섭게 친구 H네 미용실로 달려갔다. 파마로 그간 억눌렸던 일탈을 한 방에 날려버리고자 했던 것이다. 그런데 한창 머리 손질을 하고 있을 때, 옆에서 티브이를 보던 Y가 화들짝 놀라며 나를 불렀다.


“야, 강촌에서 본 그 선배 티브이에 나왔어!”

“누구? 어! 그러네.”

“개그맨 지망생이라는데?”

“원래 저 선배가 좀 웃기잖아.”


심지어 그는 ‘8년째’ 웃기고 있다. 요즘도 7명의 친구는 수능 전야에 대한 얘기만 나오면 배꼽을 잡고 웃기 때문이다. 돌이켜 보면, 그날의 일탈은 고3 시절부터 지금까지 돈독한 우정을 쌓는 데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하룻밤의 망신이 8년 동안의 연대감으로 진화한 셈이다.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 ‘키팅 선생(로빈 윌리엄스 분)’이 읊던 <가지 않은 길>(로버트 프로스트 작)에 빗대면 "숲 속의 두 갈래 길에서 ‘우리는 실수로’ 왕래가 적은 길을 택했고, 그게 ‘우리 관계를’ 다르게 만들었다"고나 할까.


어느덧 스물여섯, 우리는 다시 취업이라는 전쟁과 맞닥뜨렸다. 역시 일탈이 간절한 시기지만, 그 사이 현실에 닳고 닳은 탓인지 누구도 ‘카르페 디엠(현재를 즐겨라)’을 외치지 못한다. 철은 없었어도 수능 전야의 추억이 더 애틋한 이유다.


이덕원

애틋한 그 시절만큼 그리운 드라마 <사춘기>

c o l u m n 2007/09/13 19:32 posted by 곱씹다

MBC <사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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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BC 청소년 성장드라마 <사춘기>의 동민과 친구들. ⓒ MBC 프로덕션


'사춘기'. "육체적·정신적으로 성인이 되는 시기"를 말한다. 갑작스런 변화에 심리적 혼란이 뒤따라 '질풍노도의 시기'라고도 부른다. 1990년대 중반, 살면서 누구나 한 번쯤 겪는 이 사춘기를 오롯이 담은 드라마가 있었다. 바로 MBC 청소년 성장드라마 '<사춘기>'다.

한국판 <케빈은 열두 살>

<사춘기>는 요새 표현대로라면 '시즌'이 있었던 드라마다. 1993년 4월부터 95년 2월까지 1기 '동민(정준 분)의 사춘기'가 방영된 데 이어 95년 3월부터 96년 8월까지 2기 '재경(서재경 분)의 사춘기'가 방영됐다. 동민이 중학교를 졸업하면서 재경이라는 중학생의 사춘기로 이야기가 넘어간 것이다.


하지만 '형만 한 아우 없다'는 속설처럼 많은 사랑을 받은 것은 단연 '동민의 <사춘기>(이하 사춘기)'다. 이런 까닭에 '동민'의 <사춘기>를 돌아본다.


<사춘기>는 제목 그대로 사춘기를 맞은 중학생 동민의 이야기. 한국판 <케빈은 열두 살>이라고 볼 수 있다. 주로 자아, 친구관계, 짝사랑, 가족 등과 얽힌 동민의 고민으로 이뤄졌다.

사춘기 시절 누구나 경험할 법한 상황을 설정하고 이를 헤쳐나가는 동민의 모습을 재미있게 그려낸 것이다. 더욱이 이야기를 전개하는 동민의 독백은 사춘기 소년의 심리를 섬세하게 전달해 한결 큰 공감을 얻었다. 한 편 한 편이 곧 동민의 일기였던 셈이다.

이런 사춘기는 '청소년' 성장드라마였음에도 당시 고른 연령대의 사랑을 받았다. 청소년들이 사춘기를 보며 고민을 나눴다면, 성인들은 추억을 회상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정준이 아닌 동민의 <사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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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춘기>의 '육체미 소동 편' 중 한 장면. ⓒ 영상화면 갈무리


동민 역은 실제 중학생이었던 정준(현재 29살)이 연기했다. 그래서인지 어수룩해 보이면서도 엉뚱한 정준의 연기는 옆집에 사는 중학생 동민이 튀어나온 것처럼 자연스럽게 와 닿았고, 그만큼 동민은 많은 이의 귀여움을 독차지했다.

물론 최근 나온 성장드라마 <반올림>의 '옥림이(고아라 분)'나 <최강! 울엄마>의 '최강(진원)'에 비해 상대적으로 평범한 정준의 외모도 친숙함을 더하는 데 한몫했다.

사실 이 때문에 정준은 <사춘기>의 동민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다녀야 했다. <사춘기> 종영 후 출연한 여러 편의 드라마·영화가 인기를 얻었음에도, 정작 정준의 포털사이트 연관검색어는 아직도 '사춘기'라는 얘기다. 너무나도 사춘기 소년 동민 같았기에 받은 훈장이 오히려 그의 발목을 잡은 셈이다.


이 외에 '서원'이라는 예명으로 활동 중인 박성희가 동민의 애틋한 첫사랑 성희 역으로 나왔고, 한때 그룹 야다의 멤버로 활동한 장덕수를 비롯해 이정호, 조명식, 박소정 박인선 등이 동민의 친구로 분했다. 또 체육선생님 역으로 김상중이 출연했던 것도 지금 보면 새롭다.

춘천을 알린 최초의 드라마


<사춘기>의 또 다른 매력은 서울이 아닌 강원도 '춘천'을 배경으로 한다는 점이었다. '춘천 가는 기차'라는 노래처럼, 춘천에 대한 사람들의 낭만과 사춘기 중학생의 순수함이 잘 어우러졌기 때문이다. 실제로 <사춘기>는 이야기 곳곳에 춘천의 경치를 담아 그 강점을 제대로 살렸다. 그래서 '<사춘기>'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장면이 자전거를 탄 채 호수를 끼고 달리는 동민과 친구들의 모습이다.

특히 동민과 친구들이 다니던 아름다운 학교는 '동경'의 대상이었다. 탁 트인 전경, 나무가 우거진 교정, 넓은 운동장과 잔디밭은 작은 대학캠퍼스를 연상시켰다. 강원사대부중으로 나왔던 이 학교는 실은 중학교가 아닌 고등학교로 춘천 후평3동에 위치한 강원사대부고다.


이처럼 드라마에 대한 동경이 춘천, 그중에서도 강원사대부고로 옮아가 <사춘기>를 추억하고자 찾는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지기도 했다. 그러고 보면, <사춘기>야말로 <겨울연가>보다 앞서 춘천을 알린 최초의 드라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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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춘기>의 무대가 된 강원사대부고. ⓒ 이덕원


대본이 교과서에 실리기도


S# 1 학교 강당

신체검사 날이다. 여기저기 신체검사 하는 모습이 죽 보인다. 키를 재는 아이, 몸무게를 재는 아이……. 담임선생님이 저울 눈금을 읽으면 부반장인 지연은 옆에서 기록을 한다. 저울 앞에 줄 서서 자기 순서를 기다리고 있는 여학생들은 울상이 되어 동동거리고 있다. 뚱뚱한 수진, 바들바들 떨며 저울 위에 한쪽 발만 살짝 올려놓는다.


담임선생님이 수진에게 똑바로 서라고 말하자, 수진은 마지못해 바로 올라서며 조마조마해한다. 담임선생님, 눈금을 보며 "25!"하고 외치자, 아이들 모두 놀라는데, 다시 담임선생님이 "곱하기 2"를 덧붙인다. 수진, 창피해하며 들어가고 아이들 웃는다. (후략)


<사춘기>는 드라마 대본으로써는 처음으로 교과서에 실리기도 했다. 1993년 4월 29일 방영한 <사춘기> '육체미 소동 편'의 대본이 2001년 중학교 1학년 국어교과서 5단원 '삶과 갈등'에 20여 쪽에 걸쳐 실린 것이다. 학생들의 이해를 돕고자 참고자료로 비디오도 감상한다고 하니, 덕분에 <사춘기>는 요즈음 사춘기 소년·소녀들에게도 익숙한 드라마가 됐다.

'육체미 소동 편'은 1994년 6월 독일 뮌헨에서 열렸던 제16회 국제청소년방송제에서 청소년 픽션 부문 3위에 오르기도 한 수작. 남성적인 몸매에 관심을 두게 된 동민이 브래지어로 만든 가짜 가슴 근육을 착용하고 다니다 선생님에게 발각되면서 곤욕을 겪는다는 내용이다.

학교 신체검사에 긴장해보지 않은 이가 있을까? 체중계엔 깃털처럼 오르고 신장계에선 까치발을 드는 여학생들. 가슴둘레가 많이 나오게 하려고 신체검사 전 팔굽혀펴기를 하고 힘껏 숨을 들이마시는 남학생들. <사춘기>는 이렇게 평범한 사춘기 소년·소녀들의 모습에서 '그들의 이야기'를 끄집어냈기에 사랑받은 드라마다.

그리운 <사춘기>

어느덧 <사춘기>가 종영한 지도 12년. 그럼에도 많은 사람이 <사춘기>를 잊지 못한다. 2층 방 창문을 열고 나지막이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사춘기 소년 동민이 보고 싶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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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으로 나온 <사춘기>. ⓒ 자유시대사

그러나 안타깝게도 <사춘기>를 다시 보는 일은 녹록지 않다. 워낙 오래전 드라마다 보니 MBC에도 '다시 보기'는커녕 변변한 자료조차 남아있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MBC 프로덕션에서 편당 2∼3만원 정도에 디브이디(DVD)와 비디오를 판매하긴 하지만 동민의 사춘기만 106회에 달하는 것을 고려하면 이 또한 현실적으로 여의치 않다. 세월과 함께 늘어져 버린 비디오테이프가 야속하기만 할 따름이다.

또 드라마에 이어 나온 다섯 권의 <사춘기> 소설이 있지만 이미 절판돼 구하기가 쉽지 않은 것은 마찬가지다.

그나마 사람들은 수업자료라 구하기 수월한 '육체미 소동 편'을 비롯해 몇몇 동영상과 인터넷 음원으로 쉽게 구할 수 있는 <사춘기> OST 등의 흔적으로 아련한 옛 드라마를 추억한다.


이런 정보와 자료를 공유할 수 있는 곳으로는 인터넷 커뮤니티 '정준의 사춘기(cafe.daum.net/june94)'와 'MBC 청소년 성장드라마 사춘기(cafe.naver.com/127pp)'가 대표적이다. 이 중 '정준의 사춘기'에는 그 시절 카세트테이프에 녹음했던 파일도 올라와 있다.


유독 <사춘기>가 그리운 것은 돌이켜 보면 순수하고 아름다웠던 그 시절, 사춘기에 대한 애틋함과 맞물리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이덕원

- 덧붙이는 글 -
 

<오마이뉴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 기사 보기]
  1. Commented by BlogIcon 지창 at 2007/09/14 17:11

    이 노래 정말 좋아하는 노랜디

시간도 고통을 줄여줄 뿐 상처를 아물게 하진 못한다

d i a r y 2007/08/05 23:44 posted by 곱씹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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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덕원

 
몇 해 전, 머릿속에 불쑥 주인 모를 번호 하나가 스쳤다. 입에 익은 번호였지만 정작 내 휴대전화엔 없는 번호였다. 한참 동안 머리를 쥐어짠 끝에 나는 간신히 누구를 떠올렸고, 이내 뜨거운 눈물이 뺨을 타고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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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련 이미지


그 번호의 주인은 실제로 없었기 때문이다. 적어도 내 열여덟 살 어느 여름날부터는. 그 번호는 내가 함께 간 계곡에서 잃은 친구 ‘땅땅’의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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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덕원


우리는 모처럼 여름방학을 맞아 가까운 계곡으로 물놀이를 갔었다. 말이 물놀이지 바리바리 싸 간 건 술과 안주 따위였고, 치기 어린 술판은 일찌감치 시작됐다. 아니나 다를까 뙤약볕이 내리쬐는 바위 위에서 안주는 먹는 둥 마는 둥 마신 술에 하나둘 거나하게 취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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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진성


의미 없는 대화가 사뭇 진지하게 이어지고 있는데, 별안간 바위 아래서 풍덩하는 소리가 들렸다. 땅땅이 미끄러져 물에 빠진 것이었다. 다급한 마음에 나와 친구는 연이어 물속으로 몸을 던졌지만, 허우적거리긴 마찬가지였다. 다 같이 죽음의 문턱으로 다다르는 듯했던 그때, 마침 근처에 있던 청년들이 뛰어들어 우리를 뭍으로 건져냈다. 하지만 이미 수면 아래로 자취를 감췄던 땅땅은 다시 숨을 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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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덕원

 
어느덧 7년여가 흘러  녀석을 배웅한 그곳도 춘천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명소가 됐다. 나 또한 샛노란 염색머리의 고등학생에서 벌써 머리숱에 고민하는 취업준비생으로 변했다. 그런데 하루키의 소설 속 구절처럼 ‘죽은 자만이 언제나 열여덟’이다. 


ⓒ 이덕원

 
누군가는 시간이 해결해 줄 거라고 했다. 다른 이는 가슴 속 한구석에 묻어 두고 살아 가는 거라고도 했다. 그러나 이제 와 확실해진 건 시간도 고통을 줄여줄 뿐 상처를 아물게 하진 못한다는 것이다.


[관련 글] 지음의 부재, 그 '외로움'

이덕원

- 덧붙이는 글 - 

2007년 6월21일 작성. 

지갑 ‘잃어버려’, ‘잊어버릴’ 뻔한 추억

e s s a y 2007/07/19 20:56 posted by 곱씹다

심란한 일요일 오후, 머릿속이 복잡해 ‘에라, 모르겠다’ 하는 마음으로 이불 속으로 기어들어가려고 했다. 빗소리를 배경음악 삼아 드러누워 이것저것 끼적이며 정리하려고.

그리고 그때, 구입할 도서목록을 적어 지갑에 넣어둔 쪽지가 생각났다. 가뜩이나 무거운 몸에 이불까지 칭칭 감고 늘 지갑을 두는 서랍으로 손을 뻗쳤다. 그런데 이게 웬걸. 지갑은 ‘부재중’이 아닌가. 불길한 예감에 이불을 내팽개치고 지갑을 찾아 나섰다.

지갑을 ‘잃다’

가방을 뒤지고 어제 입은 옷을 확인해봤지만 지갑은 보이지 않았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거실을 시작으로 이불 속, 신발장, 화장실까지 샅샅이 뒤져도 지갑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변기를 세면대로 착각하고 면도기를 던지는 나이기에 집안 곳곳을 살펴야 했다).

그런데 갑자기, 어제 아버지 차를 주차하면서 보조석 의자에 뒀던 지갑을 윗도리 주머니에 넣은 기억이 떠올랐다. 중요한 ‘단서’였다. 일단 집 앞에 세워둔 차로 달려가 차내를 ‘수색’했다. 하지만 그곳에도 역시 지갑은 없었다.

인정하기 싫어도 이제 남은 건 집 밖뿐. 차를 주차하고 집으로 오는 20여 미터 사이에 지갑을 떨어뜨린 게 아닌가 하는 부정하고 싶은 확신만 들었다. 하지만 그 짧다면 짧은 골목길에는 바닥에 코를 박고 쳐다봐도 지갑은커녕 평소와 달리 쓰레기도 없이 ‘깨끗’했다.

순간 ‘새 학기를 맞아 책을 사려고 넣어둔 고액의 돈’과 ‘이따금 아버지 차를 운전할 때 기름을 넣으라고 받은 신용카드’를 잃어버렸다는 생각에 다리마저 후들거렸다.

고교시절 이후 최근 5년 여간 한 번도 잃어버린 적 없었는데 ‘드디어 오늘이구나’ 하는 직감마저 스쳤다.


우산도 쓰지 않고 지갑의 행방을 추적하다 머리와 옷은 이미 젖어 있었고, 답답한 마음에  잠시 차에 올랐다. 그런데 그때 문과 의자 사이에 끼어 살짝 고개를 내민 것, 그토록 찾아 헤맨 지갑이었다. 장장 두 시간 여동안 찾은 지갑은 그렇게 ‘불쑥 돌아왔다’.

반가운 마음에 냉큼 지갑을 집어 품에 안았다(‘세게’ 끌어안았다). 비 내리는 날 문틈에 끼어있어 축축해진 지갑을 그보다 축축해진 내가 두 손에 꽉 쥐고 집으로 ‘복귀’했다.

추억을 ‘찾다’

문득, 간절했던 마음만큼 지갑 속에 뭐가 들어 있었나 하는 궁금증이 밀려왔다. 사실 다른 물건에 비해 유난히 지갑에 ‘무심’해 좀처럼 살피는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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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갑 속에 들어 있던 '별의 별것'들. ⓒ 스폰지


지갑 속 내용물을 하나하나 꺼내봤다. ‘책값’ ‘문화상품권’ ‘도서목록이 적힌 쪽지’ ‘현금카드’ ‘주민등록증’ ‘운전면허증’ ‘학생증’ ‘교통카드’ ‘복사카드’ ‘이동통신사 회원증’ ‘병원 진료예약증’ ‘오마이뉴스 시민기자·인턴기자 명함’ 등은 당연히 알고 있던 것.

하지만 뒤이어 잊고 있던 추억 어린 내용물이 나오기 시작했다. 친구 연인에게 1000일 선물로 케이크를 사주며 만든 ‘OO제과 적립카드’(‘내 탓’은 아닌지 안타깝게도 그들은 그날 헤어졌다). 사랑하는 여인에게 처음으로 반지를 선물하며 만든 ‘골드OO 적립카드’. 처음 간 복합상영관에서 신기한 마음에 무작정 만든 ‘OOO 회원카드’.

추억에 잠긴 것도 잠시. 적립·회원카드 사이 나온 한 장의 명함은 ‘민망’하게 했다. ‘입구에서 21번을 찾아주세요, OOO 관광 나이트클럽 태수’. 지난 연말 친구 생일축하파티에 갔을 때 받은 ‘나이트클럽 웨이터’의 명함이었다(춤을 못 춰서 나이트클럽을 즐기지 않는다. 믿어 달라). ‘이런 걸 왜 여태껏 지갑 속에 고이 모셔뒀던 건가’ 하는 생각에 식은땀이 흘렀다.

심지어 뒤이어 나온 물건은 내 얼굴을 ‘화끈’거리게 했다. 담뱃갑 반만 한 크기에 분홍색으로 포장된 ‘낯선’ 물건. 내용물이 ‘꿈틀’거리는 게 뭔가 짐작이 간다 싶던 그 물건은 포장에 적힌 영어를 읽고 나서야 온전히 실체를 파악할 수 있었다. 'OOOOO Condom for beautiful sex' 특별한 영어 독해력 없이도 ‘피임구’가 확실하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단어들의 조합이었다. 오래 전 무심결에 지갑 깊숙이 넣어뒀던 것인데 잊어버린 채 지금껏 가지고 다닌 것이다(하늘을 우러러 '고기 한 점' 부끄럼이 없기에 공개한다).

얼마나 지갑에 무심했는지 새삼 깨닫는 순간이었다. 나이트클럽 웨이터 명함과 피임구가 나란히 들어 있는 지갑이라니, 지갑에 소홀한 ‘죄’로 자칫 사생활을 의심받을 수도 있는 상황이 아닌가.

때론 잃으면 잊고, 늘 잊으면 잃는다


어쨌건 돌아온(?) 지갑에 미안한 마음과 함께 환영의 박수도 보낸다. 정말 지갑을 잃어버렸다면 돈이나 신용카드, 신분증 따위 말고도 잃어버렸을 것이 참으로 많았겠으니 말이다. 물건도, 그 물건에 알알이 박혀있는 추억도.

많은 사람이 말할 때 ‘잃다’와 ‘잊다’를 구분해 쓰지 않는데, 이를테면 휴대전화를 ‘잃어버린’ 것을 말할 때 ‘휴대전화를 잊어버렸다’고 말하는 경우가 그것이다. 그러고 보면 때론 잃어버리면 잊어버린다. 물론 잊어버리는 것이야말로 잃어버리는 것이지만.

이덕원


- 덧붙이는 글 -

2007년 3월4일 작성. 

사연이 있는 음식, '돈가스'와 '된장죽'

e s s a y 2007/07/17 19:39 posted by 곱씹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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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머니는 피자나 돈가스와 함께 소주를 마시면 다음날 속이 편하다고 하신다. ⓒ 이덕원


며칠 전, 학교 앞을 지나던 길에 돈가스를 사서 집으로 왔다. 늦은 저녁 시간, 출출해질 밤을 대비해 산 간식이기도 했지만, 돈가스는 우리 어머니가 가장 좋아하시는 음식 중 하나기 때문이었다. 사실 어머니는 넉넉한 양에 구색을 다 갖추고도 3,500원이라는 그리 비싸지 않은 가격에 먹을 수 있는 그곳의 돈가스만을 맛있다고 하신다.

늘 그렇듯 밤참은 소주 안주가 됐고 모처럼 가족들은 모여앉아 술도 마음도 나눴다. 그런데 돈가스를 맛있게 드시는 어머니를 보는데 문득 가슴 한구석에 알알이 박혀있던 옛 기억이 떠올랐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어머니가 돈가스를 싫어하시던 때가 고스란히 떠올랐다.

어머니가 돈가스를 싫어하시던 시절


십수 년 전쯤, 나는 며칠 동안 어머니에게 떼를 쓴 끝에 돈가스를 먹으러 갔다. 그런데 예전과 달리 어머니는 돈가스를 하나만 시키고 드시지 않았다. 열 살가량 어린아이였지만 그래도 전교에서 내로라하는 덩치여서 웬만한 성인 목은 족히 먹어치웠는데도 말이다.

결국, 돈가스는 온전히 내 몫이었다. 흐릿한 기억이지만 어머니는 허겁지겁 먹는 아들의 권유에도 전혀 입을 대지 않으셨다. 지금은 누구보다 돈가스를 좋아하시는 어머니가 한때는 그렇게 돈가스를 싫어하셨던 것이다. 

당시 어머니는 돈가스를 싫어하실 수밖에 없었다. 아니, 싫어하시는 척할 수밖에 없었다는 게 맞는 말이겠다. 사실 그 무렵 아버지가 하시던 사업이 잘못돼 생활이 어려웠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날 이후 나는 하교 길에 친구들과 방방을 타는 대신 학교 앞에서 지키고 있던 아저씨 아줌마를 시장 골목골목을 돌며 따돌리는 놀이를 했고, 한겨울 연탄을 때지 못해 춥다고 울며불며 잠 못 이루었다. 그리고 그렇게 울던 아이를 어머니는 말 없이 안아주셨다.

내가 세상에서 제일 싫어했던 된장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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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된장죽은 물에 불린 쌀을 끌이다 된장을 풀고 얼갈이배추, 감자 등을 넣어 조리한다. ⓒ 이덕원


무엇보다 철없던 어린아이에게 가장 크게 다가온 어려움은 이제는 아무리 떼를 써도 돈가스는커녕 그 어떤 맛있는 음식도 먹을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매일 정체를 알 수 없는 죽을 먹어야 했고, 된장을 풀고 배추를 넣고 끌인 게 전부인 그 죽이 어린아이는 세상에서 제일 싫었다.

그리고 십여 년이 지난 지금 아버지와 어머니의 노력으로 어머니는 돈가스를 다시 좋아하시게 됐고, 나는 다시 반찬투정을 한다. 그동안 어릴 적 먹던 된장죽은 정말이지 생각조차 하기 싫었다. 그리고 어머니도 좀처럼 된장죽을 드시지 않았다.

돈가스와 소주를 다 비우고 아버지와 어머니도 그만큼 얼큰하게 취하셨을 즈음 나는 다짜고짜 어머니에게 조만간 된장죽을 해먹자고 졸랐다. 어머니는 뜻밖이라는 듯 고개를 갸우뚱거리셨지만 정말 된장죽이 먹고 싶었다. 그리고 그 사이 내 입맛이 변해서인지, 상황이 달라져서인지 십여 년 만에 먹은 된장죽의 맛은 나름 별미였다. 

된장죽 한 대접을 다 비우고, 문득 자장면이 싫다고 하셨다는 유행가 노랫말 속 어머니는 우리 어머니들의 모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덕원


- 덧붙이는 글 -

2006년 9월16일 작성.

<미디어다음> '블로거뉴스'에도 실렸습니다.